“At this, those who heard began to go away one at a time, the older ones first, until only Jesus was left, with the woman still standing there” (요 8:9)
음행한 여자를 돌로 치려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죄 없는 자만 돌로 치라고 명하셨고, 그러자 나이 많은 자들부터 뒤돌아 떠나기 시작했다.
왜 나이 많는 자들부터 떠나기 시작했을까. 그들이 오래 살아온 만큼, 자신의 죄성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반대로, 젊은이들은 자신의 죄에 더 무지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나이 많은 이들보다 의롭게 생각했기 때문에, 음행한 여인을 치려는 자신을 더 정당화 했을까?
아직 젊은이인 나는 나의 안에 도사리는 죄에 대해 무지하고, 내가 스스로를 생각보다 의롭다 여기고 있을 수 있겠다 싶다. 곧 내가 생각하는 게 정의라 여기고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이 칭하신 의인이 아닌, 내가 정의로운 행위를 해서 획득한 의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다. 나의 행위를 통해, 사람의 인정을 통해, 좋아보이는 결과를 통해 나는 나의 의로움을 정의하고 있을지 모른다. (예수님께서도 음행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나도 나를 정죄하지 않겠다.)
곰곰히 마음을 살펴보니 스스로 부여한 의인의 정체성은 ”획득, 성취, 풍요“ 의 메커니즘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세상적 관점의 진보로 평가된다. 하지만 유일하게 무결하신 의인이신 예수님께서는 “획득, 성취, 풍요” 를 쫓고 바라는 모든 무리들을 거스르시고 “소실, 희생, 무력” 의 길로 스스로 걸어가셨다.
“획득, 성취, 풍요”로 설명되는 세상적 가치의 성공은 쾌락으로 가득하게 만든다. 기분이 짜릿하고 좋다. 고양감이 든다.
반대로 “소실, 희생, 무력”, 세상에서는 실패로 여겨지는 것들은 언뜻 절망감, 무기력함으로 사람을 가라앉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단, 세상에서의 것들만이 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 믿을 때만 그렇다. 그것들의 없음을 죽음이라 여기니까.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 세상의 그 어떤것도 우리의 생명에 조금도 관여하지 못한다. 육의 생명이 아닌 영원한 영의 생명에 경우에 말이다. 그 사실을 전심으로 믿게 될 때, 세상에서의 실패는 씨를 뿌리는 일이 되고, 짜릿한 고양감이 아닌 생명의 근원에 접속되는 충만한 기쁨을 누린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더 경험하길 원한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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