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연재 주기가 갑자기 훅 길어져서 그 사이에 이 레터의 존재를 까먹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한국에 돌아온 뒤 너무 늦지 않게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라고 다짐했는데, 막상 일상으로 돌아오니 여유가 잘 나지 않았어요. 시간의 여유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던 게 더 크겠죠.
왠지 뉴스레터를 마무리 지으면 베를린에 굿바이 인사를 보내는 것 같아서 더 보내기 싫었는지도 몰라요. 고작 2주가량 머물렀으면서 이렇게나 질척거리다니. 그래도 지금 발 딛고 있는 오늘을 더 잘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니 이젠 놓아 주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야기를 보내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요. 조금은 무거울 수도 있지만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왔다면 마주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나눠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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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ent
의식하지 않아도, 느낄 수 밖에 없는
사실 저는 알아주는 편식쟁이 입니다. 한식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생김치를 안 먹고 남들이 환장하는 회나 해산물도 안 먹어요. 가끔 알레르기가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그때마다 '못'이 아니라 나의 의지가 투영된 '안'이라고 못을 박곤 하죠 ㅎㅎ
여행을 할 때도 편식이 심해요. '여기에 왔으면 꼭 가야할 곳'처럼 여겨지는 유명 관광지는 크게 끌려 하지 않고, 그냥 평소 저의 관심 바운더리 안에서만 움직이는 편이거든요. 베를린의 수많은 역사박물관과 전쟁을 상징하는 기념물 역시 그 범주 밖에 있었습니다. 도착하고 나서도 '다른데는 별로 끌리지 않고...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정도는 의미가 깊은 곳이니 가 봐야지' 라는 가벼운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도시의 뿌리는 제가 무시한다고 흐려지는 게 아니잖아요. 베를린 시내 곳곳에 스민 이 도시의 정체성은 제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들에 훅훅 다가왔습니다. 하루는 처음으로 도심에 나와 기쁜 마음에 한 손에는 맥주 캔을 들고 운터 데 린덴 거리를 신나게 걷던 날이었어요. 웬 그리스 신전 같은 건물 앞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더라고요. '여긴 뭐지?' 하며 들어간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두컴컴한 공간 한가운데 빛이 들어오도록 나 있는 천장. 면적은 넓지만, 가운데에 딱 하나의 조각상만 있는 곳. 제가 우연히 만난 곳은 바로 추모 공간 '노이에 바헤' 였어요.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폭군, 폭정에 의해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위해]라는 문구가 쓰여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독일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인류 보편의 슬픔을 기리는 곳이 되었다고 해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간 곳에서 만난 묵직한 문장들에 마음이 미어졌고, 조용히 묵념했습니다. 그 공간이 조용히 유지되도록 자리를 지키는 경비원 한 분과 하늘에서 비친 빛 한 줄기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길을 나섰을 때는 이전과는 이 도시를 대하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어요.
사실 베를린은 최근에나 힙, 예술가들의 도시, 자유로움이라는 키워드로 인식되고 있지, 보통은 '베를린 장벽'을 비롯해 분단되었던 도시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거예요. 실제로 '베를린에 왔다면 가야 할 곳'의 대다수는 역사적 배경과 연관되어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길을 걷다가 뜻하지 않게 그 흔적을 만나는 경우가 빈번했고, 박물관을 거부하고 제가 선택한 현대 미술관에 갔을 때도 베를린 역사의 영향을 많은 작가나 기획, 작품이 잊을만하면 툭툭 튀어나왔어요.
어쩌면 저는 사람들이 베를린에서 역사적 의미가 담긴 장소들을 다니는 모습을 이해에 기반한 다크투어리즘이 아니라 관광지 스팟 찍기와 별 다를 바 없다고- 아주 제 멋대로 속단하고 있었는지 몰라요. 가야할 곳이라고 해서 한 번이라도 들르고, 짧더라도 그 의미를 되새기는 사람과, 그 만남조차 차단하려고 하는 건 분명 차이가 있는 데 말이죠. 즐거우려고 오는 여행이라는 핑계로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 위주로 섭취하려고 했던 안일함이 부끄러워지더라고요.
베를린에 예술가들이 모여든 것도, 다양성을 품은 도시가 된 것 역시도 이러한 배경에 기인하는 걸 거예요. 자연스럽게 편식쟁이의 고집을 내려놓고, 역사적 배경이나 그 흔적들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작정하고 역사적 명소만 찾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모습들에 최대한 귀를 기울였어요.
베를린을 이해하고 이 도시와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과거의 시간들이 현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고, 그 물음을 계속해서 던지고 답하고 싶다는 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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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엔 혼자서 오랜 시간을 보낼 테니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해야지!' 라는 작은 목표를 들고 갔는데요, 막상 도착해서는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라 그렇게 진득하게 고민할 시간은 없더라고요.
그럼에도 그 걸음걸음들 사이에 일상에서도 가져가고 싶은 조각들이 생긴 것 같아요. 낯선 것에 선을 긋기보단 보다 수용적인 태도를 가져보자는 것. 아직도 지구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희생자가 생기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제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저버리는 것은 오히려 나아가지 못하고 고여 있게 만들 뿐이라는 것.
그날의 기억이 무색하게도 일상으로 복귀한 뒤에 제 눈앞에 현실만 바라보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관성적으로 편식쟁이로 돌아간 체 제가 취하고 싶은 것들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바빴죠. 그래서인지 다 써놓고도 발행 버튼을 누르기가 힘들었어요. 이렇게 마지막 레터를 보내며 다시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베를린에서의 순간들을 나의 현실을 도피하는 방향이 아니라 우리의 오늘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만드는 방향으로 간직하자고.
- 2024. 06. 04 | 베를린에 다녀온 마음을 기억하며, 한국에서 씀 -
epilogue
그래서 베를린의 매력은...
사람마다 여행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도 다른 만큼 베를린을 설명하는 수식어들이 참 많더라고요. 각자가 '여기가 가장 베를린스러운 곳이야'라고 주장하는 장소도 달랐고요.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
반란의 도시
스타트업의 아우토반
예술의 수도
제 2의 뉴욕, 자유의 도시
....
저도 뭔가 멋있는 수식어로 정리를 하고 싶었는데... 제가 경험한 베를린은 결코 한 단어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도시였어요. 특정 세대, 장소, 문화가 이곳을 대표한다기엔 너무나 복잡다단한 매력을 지닌 곳이라서요. 여기에 가야 베를린을 느낄 수 있어 혹은 이래서 베를린이 좋았어! 라는 말도 단언하기엔 망설여지네요.
무언가를 함축하는 말이 때로는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핑계를 대 보면서... 저의 어쭙잖은 표현 대신 베를린을 보여주는 노래 가사를 인용해봅니다.
이 레터를 통해 베를린을 만나신 분들에게는 이 도시가 어떻게 다가왔을지도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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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레터를 보냅니다. 마감 없는 레터라서 위기가 자주 찾아왔지만... 함께 해주신 여러분 덕분에 마무리까지 지을 수 있었어요!
저는 일단 끝을 냈다는 사실이 기쁜데 ...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모르겠네요.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댓글 달아 주셔도 좋고, 메일리 로그인이 불편하신 분들은 여기 구글 폼에 남겨 주셔도 좋아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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