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삶에서 중요한 가치로 평가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근면, 성실, 정직과 같은 가치가 인정받았던 시대는 이제 사라진 듯합니다. 현대는 능력만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라고 하죠. 다만, 성공을 거둘만한 사람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실패한 사람 역시 그럴 만해서 실패했다는 뜻이 됩니다. 능력주의 하에서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능력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불운한' 사람들이 아닌 '실패한'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상업적 체제의 논리 아래, 경제적 요구는 언제나 인간적 요구에 우선합니다. 노동자가 어떤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는 것, 따라서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변함없이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알랭드 보통, <불안>)
사회는 경제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쉽게 규정합니다. '그럴 만해서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멸시는 배달 노동자와 같이 법적 테두리에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는 일의 괴로움과 위험성을 손쉽게 지워냅니다. 경제적 논리 아래 인간적 욕구를 거세한 '원룸'이라는 최소 단위의 거주 공간이 꾸역꾸역 재생산되고, 대개 1인 가정의 가장인 청년들은 (지속적) 거주가 아닌 (임시적) 체류의 상태 속에 영원히 호명되지 않은 채 부유합니다.
도달 불가능한 춤을 추는 김아영의 딜리버리 댄서
김아영의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 등장하는 배달 노동자는 코로나 시대의 청년-상징 같은 존재입니다. 완벽하게 경제적이고 상업적인 체제의 논리 아래, '건당' 금액이 책정된 이들은 '최적화된 동선'에 따라 움직이며 온몸으로 내달렸습니다. 인간으로서 최적화를 요구받는다는 것은 인간적 욕구를 말소당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니까 필요한 것들-안전, 휴식, 어쩌다 헤매는 경우를 포함한 오류들-은 AI 시스템 앞에서 모두 지극히 비효율적인, 고려 대상이 아닌 조건들입니다.
가상의 배달 플랫폼 '딜리버리 댄서'의 AI알고리즘 '댄스마스터'는 언제나 최단 거리를 연산해 직선으로 알려줍니다. 물론 현실에서 길은 직선이 아니고, 인간은 쉴 새 없이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이지만요. AI 댄스마스터는 늘 인간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최적화된 상태에서 배달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으니까요. 불가능에 가까운 제안을 계속해서 수락해야 하는 배달 노동자를 등급으로 평가하고 배척하는 이 모든 시스템은 상업적 체제의 논리 아래 기업의 이윤을 최대화하는 당연한 요청일 뿐이죠.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에른스트 모'는 오늘도 댄스마스터의 목소리를 따라 달립니다. “오늘도 항우울제와 항히스타민제, 항생제, 마취제에 푹 젖어 있는 한강! 오후 7시,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 가장 우아한 서울의 경로를 안내해 드려요!” 최적의 배달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온갖 위험을 마주하게 됩니다. “배달이 지연되었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사실상 이미 죽은 '고스트 라이더'가 아니면 따라갈 수 없는 불가능한 속도의 세계로 그는 계속해서 호출됩니다.
이 지점에서 현실과 환상은 중첩됩니다. "무한 수신되는 배달의 콜과 무한 생성되는 배달의 경로는 마치 미로와도 같"아서, 순간 순간마다 에른스트 모는 자신의 세계와 완벽하게 동일한 다른 세계를 끊임없이 마주합니다. 시시각각 가능성의 가지가 파생되는 평행 우주와 같은 세계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 완벽하게 동일해 보이는 상대 '엔 스톰En Storm (Monster의 철자 바꾸기anagram)'을 만납니다.
위태롭게 중첩된 방과 방, 상희의 원룸 바벨
상희의 ‹원룸바벨›은 서울에 거주하는 20-30대 청년들의 주거공간을 스캔한 데이터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거의 균질한 원룸을 산호와 같은 외관으로 러프하게 다듬고 쌓아올려 마치 심해의 '산호 군집'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탑을 구성하였습니다. 사용자는 VR기기를 사용해 이 심해를 여행할 수 있습니다. 안내자인 해파리의 시선을 따라가면, 원룸에 거주하던 이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집은 쾌적하지 않습니다. "잠을 자는 공간에 간이 옷걸이가 같이 있는 구조가 싫어요. 다음에는 옷장이 있는 집으로 이사할 거에요. I hate placing a clothes rack in the room I sleep. Next time, I want to move to a house with wardrobe." 경제적 논리에 따르면, 이들은 그 공간에 맞는 돈을 지불하고 그 정도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겠지만요. 누구도 침대 옆에 행거가 붙을 정도로 '몸을 겨우 집어넣는' 공간에 살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원룸은 다닥다닥 몸을 맞대고 붙어있고 생활 소음은 쉽게 공간을 침범합니다. "원룸에서 종종 들리는 이웃의 소음이 나쁘지만은 않아요. 그런 소음이 제게 무서움과 외로움을 잊게 해주기도 하거든요. I can hear the noise from the neighbor. It is not bad since it makes me forget my fear and loneliness." 원룸과 원룸 사이, 문득 옆에 누가 있다는 자각만으로 조금 외로움을 덜어내는 사이. 물리적 거리는 지극히 가깝고, 마음의 거리는 지극히 먼 사이.
나 하나를 스스로 온전히 지탱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닌데, 경제적 논리 속에서 나는 여전히 한 사람의 몫을 채 하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어른이 되는 걸 영원히 미루는 것 같아요. 가끔은 그게 제 잘못인 것 같기도 하고요. Growing into an adult is perpetually suspensed. Sometimes it seems to be my fault." 외지에서 서울로, 혹은 부모에게서 독립한 청년들은 오늘도 '집'에 안주하지 못하고 부유합니다.
상희의 <원룸바벨>은 백남준아트센터의 《빅브라더 블록체인》에서 8월 18일까지 전시 중입니다. 인터랙티브 VR인 만큼 기기를 착용하고 직접 해파리의 시선을 따라 가는 체험이 가능합니다. VR 기술이 도입된 이후 여러 분야에서 접하다 보면 실제 현실에 가깝게 구현하기까지 아직 멀었나 싶기도 한데요. 소위 '불쾌한 골짜기' 같은 지점에서, 오히려 기술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원룸의 핍진성을 지우고 현실을 마치 가상 세계처럼 거리-두기로 표현하는 데는 최적화된 느낌이었습니다.
김아영의 <딜리버리 댄서의 구>를 처음 본 건 2022년 제1회 프리즈 서울이 열리던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였어요. 정신 없는 행사 중에도 작품이 정말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 올해 프리즈 서울에서 작가님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링크)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의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 8월 25일까지 전시 중이니 기회가 되면 들러보세요.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아래 『김아영: 합성의 스토리텔러』 책을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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