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열두 번째 음악단어편지입니다. 지난 음악단어편지는 실수로 다음 날 예약을 걸어두고 수정을 한다는 걸 그 전날 예약을 걸어둬 바로 발행이 됐는데요. 의외로 바로 편지를 읽어 주셔서 놀랐어요. 그래도 편지는 약속이니까 앞으로는 꼭 화요일 오전 9시에 보내겠습니다.
2018년 11월 24일. 검은 안개가 동네를 뒤덮었습니다. 밖에 나온 사람들은 건너편 건물에서 불이 났다고 했어요. 다행히 인명 사고는 없었지만 저는 지구가 정지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친구와 연락할 수도, 지도로 그날 가야 할 장소를 검색할 수도, 근처 식당에서 식사하고 카드 결제를 할 수도 없었거든요. 아마 많은 분이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 사건 날의 일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세상과 단절된 기분을 느낀 저는 인터넷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후 뉴스를 통해 이럴 때 가장 필요한 물건이 뭔지 알게 됐습니다. 그건 바로 와이파이, LTE가 끊겨도 소식을 전달받을 수 있는 라디오였어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소비로 연결하는 재주가 있는 저는 이때를 핑계로 태양전지와 손전등이 달린 라디오를 하나 샀습니다. 처음 작동이 되는지를 체크하고 자 이제 라디오의 세계에 빠져…보기는커녕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켜 본 적 없어요. 어디까지나 새 소비를 위한 핑계였으니까요. 집 인테리어에서 ‘빈티지’와 ‘레트로’ 파트를 담당하던 라디오는 장식장에 놓여 있다 어느새 다른 물건에 밀려 수납 박스로 향했습니다.
전에 룸306의 새로 발매되는 싱글을 두고 논의했어요. 멤버의 의견을 따라 이번에는 디지털 싱글로 발매되는 곡을 짧은 버전으로 다시 편집했거든요. 원래 버전과 싱글 버전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몇 가지안을 두고 이야기하다 예전처럼 ‘라디오 에디트’라는 표현이 나왔고 저는 지금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렇게 라디오라는 미디어를 구시대로 보내고 나니 갑자기 박스에 쳐박힌 라디오가 생각나더라고요.
수납 박스에 들어간 라디오를 오랜만에 꺼내 먼지를 털어 주고 전원을 켠 순간 잊고 있던 옛 노래와 잊고 있던 옛 연인이 보낸 사연이 흘러 나오…기라도 했으면 감동적으로 글을 맺을 수 있었을 겠지만, 여전히 라디오는 비상 상황을 대비해 수납 박스 안에 들어 있고요. 대신 저는 지난주부터 EBS 펜타곤의 밤의 라디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을 해 LP 레코드를 틀 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전개죠?
EBS가 있는 일산까지 1kg이 조금 넘는 LP 레코드를 들고 가며 대체 라디오에서 LP 레코드를 트는 게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서 수백 번을 생각했지만 찾을 수 없던 답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청취자 분들이 LP로 음악을 튼다는 것만으로도 좋아하고 반응해 주시더라고요. 제 실수로 잠깐 소리가 튀거나 지지직거리는 소리만 1분가량 나온 적도 있는데 실수를 지적하기는 커녕 대부분 LP를 듣는 기분이 난다며 좋아하셨어요. 을지로 LP 바가 된 듯한 느낌도 들긴 했지만 그제야 비로소 저는 제 안의 사케즘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제가 한 고생의 보답을 찾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을 굳이 LP 레코드로 갖고 있는 것도, 지구가 정지한 느낌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라디오를 사는 것도 그리고 보고 들을 게 많은 시대에 굳이 라디오를 듣고 있다는 것도 다 이상한 일인걸요. 제 출연분은 매주 금요일 저녁 10시부터 12시 사이에 방송됩니다. 이상한 일을 하고 싶은 분은 들어 주세요.
지난번에 제가 작은 선물을 드린다고 했었죠? 지금 들려드릴 곡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그리고 정식으로는 공개되지 않을 룸306의 ‘위안’이라는 곡입니다. 정식으로 공개되지 않는 건 이 곡이 ‘My Favorite Thing’의 번안곡이거든요. 저작권자를 통해 개작 가능 여부를 물어봤는데 이미 고인이 된 원작자의 후손이 곡을 개사하는 걸 꺼린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이 곡은 앨범에 실리지 못하고 유튜브와 사운드클라우드에만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 유튜브와 사운드클라우드에만 공개하는 게 뭐 크게 다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이 글의 세계는 이상한 일로 가득한걸요. 며칠 뒤 공개할 곡을 미리 들려드리는 거로 생색을 내는 게 조금 쑥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잘 들어주시면 기쁠 거예요. 룸306의 세 번째 앨범 <술과 꽃>은 3월 18일에 발매됩니다.
이상한 일이 잔뜩 일어나는 세계지만 구독자 님께 이상해도 좋은 일이 가득 일어나길 바라며 열두 번째 음악단어편지 마무리합니다. 다음주에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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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이상한 일이 잔뜩 일어나는 세계지만 김유진 님께 이상해도 좋은 일이 가득 일어나길 바라며"라는 마지막 문장이 끌려 자꾸만 읽게됩니다. 박국님도 괜찮고 좋은 하루하루가 인생에 8할이상이 되시길 바랍니다. 늘 따뜻한위로가 담긴 편지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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