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에서

2024.10.09 | 조회 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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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의 주석

말보다 글이 유창한 인간의 주절주절

 

 

“‘기사님, 폼페이로 가주세요.’라고 말해야겠어요. 다시 만나면.”

“우리 결국 폼페이에 못 갔네요. 그날.”

 

휴대폰 액정을 넘기던 디디의 손가락이 멈춘다. 배흘림 기둥 앞에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츠키의 사진이 선명하게 보인다. 디디가 이츠키의 얼굴을 확대하자 이츠키는 사진 속처럼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다. 디디는 이츠키의 품 안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사실 불꽃 축제에 갈 계획은 아니었다. 이츠키는 늘 익숙한 것 중에 안전한 것을 택했고, 여행에선 그 룰을 철저히 따랐다.

 

숙소 근처 시장 구경은 이츠키다운 선택이었다. 택시 기사는 룸미러로 힐끗 두 사람을 살피더니 서향시장에 가는 이유를 물어왔다. 축제를 보러 왔냐 하기에 디디가 축제 중이냐 되물었다. 특별한 이유도 이어지는 계획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택시 기사는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년 전에 자식 놈이 이탈리아 여행을 보내줘서 폼페이에 가 봤는데 서향시장 생각이 나더라고요.”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상설로 열리는 중앙시장을 중심에 두고, 동서남북에 작은 시장 하나씩이 닷새마다 열렸다. 이렇다 할 산업을 가지지 못한 도시가 그렇듯 해솔시의 인구는 애석하게도 자꾸만 줄어갔다. 남원, 북원, 동향이 차례로 무너지고 관광객이 몰리는 중앙 시장과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들의 놀이터인 서향시장만 살아남게 되었다. 택시 기사는 자주 말을 끊었다가 이어 붙였다. 관광객에게 해도 되는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고르는 듯 보였다. “시에서는 아저씨들이 밤늦게까지 노닥거리는 게 보기 싫었는가 보죠. 하긴 돈도 벌고 싶었을 거야. 아재들 주머니 털어봤자 오천 원, 만 원이 전부니까.” 이츠키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폼페이 주변을 지도로 훑었다.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관아터와 성당은 서향시장 살리기에 편리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 많던 아저씨들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에 빠졌다.

 

“오신 김에 불꽃놀이도 재밌게 보고 가세요.” 경쾌한 인사를 건넨 택시기사는 다시 여름 손님을 태워 핸들을 꺾었다. 서향시장까지 걸어서 10분 즈음 떨어진 사거리에서 그들은 묘한 흥분을 느꼈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안내 멘트가 건물 벽에 부딪혀 다시 울리길 여러 번이었다. 가족들은 좋은 자리를 찾아 돗자리를 펴고 있었고, 어깨에 손을 두른 연인들은 여유롭게 산책을 즐겼다. 해솔관아터는 마치 ‘행복에 취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모여 축제를 즐긴다.’라는 지문을 연기하는 배우들로 가득 찬 무대 같았다. 가로수에는 청사초롱이 매달렸고, 하늘을 비추는 커다란 스크린과 무대를 비추는 조명들 덕분에 여름의 열기는 밤에도 식을 줄 몰랐다. 그때였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격양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5까지 세고 나머지는 흥분한 관중들의 목소리만 들렸다. 마침내 불꽃놀이가 시작되자 디디는 이츠키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 지금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이츠키랑 내가 주인공인 영화 말이에요.”

“재밌는 의견이네요.”

 

불꽃이 터지는 동영상을 보던 디디가 이츠키의 말투를 따라 한다. “재밌는 의견이네요. 재밌는 의견이네요?” 짐짓 태연한 척 연기하던 이츠키는 입술을 축 늘어트려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디디의 달콤한 선창에 이어지는 이츠키의 무뚝뚝한 후창은 두 사람의 대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레퍼토리였다. 다시 집은 책을 읽기 위해선 한 장 아니 한 문단 앞이라도 다시 읽어야 했다. 그래야 대강의 흐름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츠키는 디디와의 연애를 시작하면서 이전의 연애들을 반추했다. 일관된 파형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지금 사랑에 대입할 어떠한 쓸모도 없었다. 디디와 가까워질수록 마치 중력이 전복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이츠키의 사랑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무뚝뚝함과 예민함은 디디의 솔직한 표현과 해사한 미소 안에서 귀여움으로 여겨지곤 했다. 이츠키가 경험하지 못한 과분한 사랑이었다. 그것을 손에 꼭 쥐고 절대 놓지 않으리라 다짐하곤 했다. 지금, 침대 위에서 디디와, 지난 여행을 추억하는 일 역시 사랑의 일부였다.

 

불을 품은 씨앗은 꽃으로 피어 잎의 궤적을 그렸다. 목마를 탄 아이가 손을 뻗으며 “어, 별똥별이다.” 하자 관중들은 저마다 소원을 하나씩 마음에 품기 시작했다. 무엇도 욕심이 아닌 밤이었다. 이츠키와 디디는 불꽃이 시작되는 천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디디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림자판 뒤에 선 딸과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그림, 그걸 보며 흐뭇해 하는 행인, 민속놀이를 하며 꺄꺄 웃는 어린아이들, 담장 뒤 행차 놀이를 즐기는 주민들, 푸드트럭 앞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연인 그리고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이츠키도 사진에 담았다. 어느새 사진첩에는 사랑의 증거들로 가득 찼다. 한여름의 열대야는 디디의 티셔츠를 적시고 있었다. 연신 디디를 향해 부채질을 하던 이츠키는 디디의 하얀 뺨 위에 피었다 사그라드는 불꽃의 장난에 정신이 팔렸다. 팡! 마지막 씨앗이 하늘로 솟구쳤고, 천변은 자욱한 연기로 가득했다. 두 사람은 허리를 둘러 서로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순간 화산 폭풍우가 몰아친다면 우린 무얼 품어야 할까요?”

“오늘 디디가 찍은 사진들이요. 그거라면 누구도 사랑을 금지하지 못할 거예요.”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아이유(with 도경수) - 별 떨어진다(I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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