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격을 가하는 투우사, 마따도르

2023.12.05 | 조회 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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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의 주석

말보다 글이 유창한 인간의 주절주절

 

윌리엄이 푸른 셔츠 차림으로 포토벨로 시장을 걷는다. 꽃들은 축포를 터트리듯 만발하고, 봄의 기운은 거리의 모두를 연인으로 만들 기세다. 빼쪼롬하게 굳은 표정으로 걷는 그만이 혼자다. 사람들은 언감생심 유명한 여자를 만났던 탓이라고 수군거린다. 하지만 그는 소문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잠시 웃고, 인사를 나누고, 다시 걷는다. 여름을 지나 바람이 서늘한 계절에도 그대로이다. 다만 푸른색 셔츠 위에 밤색 자켓을 걸칠 뿐이다. 사람들은 추운 계절에 열성을 다해 축제를 열고 술판을 벌인다. 얼어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노팅힐’의 한 장면에서.

 

마음의 가루들이 켜켜이 가라앉은 가을이었다. 아무런 자극 없이 또 하루를 보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 타기가 시작된 날이었다. 흑맥주와 함께 ‘노팅힐’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애나와 헤어진 윌리엄이 포토벨로 시장을 묵묵하게 걷는 장면은 언제봐도 위로가 됐다. 회전하는 세상 속 부단히 걷는 그의 모습은 멈추지 않기 위해 태엽을 돌리는 나와 같았다. 윌리엄은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서점에 앉아 CCTV를 보거나 얼빵한 직원과 농담을 주고받는 윌리엄, 교실에 앉아 월별로 빼곡하게 들어찬 수업 파일을 뒤적거리는 나, 우울은 그곳에서 시작되곤 했다. 훌륭한 체계를 이룬 것이 분명하지만 1년이라는 쳇바퀴는 내가 삐끗하는 순간 지긋지긋한 지루함의 구석탱이로 몰아세웠다. 이내 무기력으로 번져 공허한 교실에서 고개를 좌로 우로 젓기도 했다. 변화가 필요했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로 걸어 나가기에 나의 심성은 너무 쫄보였고, ‘작은 반환점’ 정도가 나에게 알맞은 답안이었다.

 

그즈음 교육대학원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의 고민, 이어진 조사 그리고 주변의 조언을 얻자 ‘까짓것 시험이나 봐보지 뭐.’ 상태가 되어버렸다. 떨어진들 잃을 것이 없었고, 운이 좋아 붙어도 생애주기 상 나름의 장점과 단점이 공존할 터였다. 그러니 합격 유무를 떠나 ‘날뛰는 우울의 정수리를 찔러보자! 엄습해 오는 데드라인 앞에 멀쩡할 쏘냐!’하고 지원서를 작성했다. 그 순간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가루들이 폭죽이 되어 터졌다.

 

전공서적을 읽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평소 책을 가까이하고, 자주 글을 쓰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휴대폰을 괜히 만지작거리고, 책상 정리를 시도 때도 없이 해댔다. 공부를 시작한 지 2주 후에야 ALT 1시간을 찍을 수 있었고, 습관으로 만드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반면 답습에서 오는 즐거움도 있었다. 임고생 시절 공부하던 버릇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코넬식으로 노트정리를 하고, 정리한 것을 녹음해서 여러 번 들으면서 이해하고 외워나갔다.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는 일은 낯선 이와 마주한 소개팅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이세계의 낯섦이 혼란을 주다가도 ‘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었는데.’하는 공감에 기반한 친밀감이 쌓여갔다. 피천득 작가가 이야기한 ‘반사적 관영’을 읽고 감탄했던 것이 3년 전이었고, 이후로 ‘남 잘난 덕에 오늘 하루도 무사했군! 후후’하면서 잠들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전공서적에서 ‘남이 성공해야 나도 성공한다.’라는 문장을 읽게 되니 ‘역시 세계는 하나로 통하나 보다!’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펜을 쥔 자리에 작은 굳은살이 박였다. 손가락 마디에 뻐근한 근육통을 느끼며 흐뭇한 마음으로 잠드는 날이 계속됐다. 교실에 대해 모두 아는 것처럼 굴었지만, 자의로 뛰어들었던 수험 생활 동안 미지의 세계를 들락날락했다. 처음 ‘교육’이라는 글자를 마주했던 19살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궁금한 것, 해보고 싶은 것 그리고 해낼 자신 같은 것들이 내 심장을 향해 꽂혔다. 그러자 쳇바퀴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담임교사를 맡아 학급 문집을 만들 때 지었던 제목이 ‘트로피’였다. 그 당시 서문에 이렇게 썼다. ‘승자만이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건 아냐. 선생님은 각자의 방식으로 멋지게 트로피를 거머쥘 너희를 평생 응원할 거야.’ 그리고 올해, 그 서문을 그대로 썼다. 처음 마음 그대로 간직한 채 말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 올해도 트로피를 들어 올리기 위한 준비를 하는 중이다. 시작하는 마음으로, 또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적재-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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