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온통 그림자만 있었다.
그림자만 있는 곳에서 우린 그걸 그림자라 할 수 있을까? 아마 내가 빛이란 걸 알고 있기에 그것을 ‘그림자’라 부를 수 있겠지. 이곳 사람들에게 이것을 무어라 부르는지 물으니 ‘존재'라 답한다.
존재란 무엇일까.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영화 <데몰리션> 속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아내가 죽지만 어떠한 슬픔도 느끼지 못한다. 평소와 같이 일어나 장인어른 회사에 출근하고 일을 한다. 감정을 숨기는 데 능하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영화를 보고 나는 문득 감정이 팔레트와 같다면 과연 그 다양한 색들을 어디서 가져올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평생 채워놓지 못할 팔레트의 한 구석이 있을까. 색으로 채워지지 못해 먼지만 쌓여 있는 그런 수북한 곳.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의 고민을 듣고 위로를 해줄 때 속으로는 저녁 메뉴를 고민한 적 있었다. 김치찌개를 먹을지 된장찌개를 먹을지. 만족스러운 위로를 받은 친구는 기분이 나아져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나는 된장찌개를 먹었다. 밥을 말아 넘기며 그제야 생각해봤다. 위로는 과연 내가 한 것일까 친구가 스스로 한 것일까.
우리는 살면서 꽤 많은 사람 -더 나아가 여러 존재- 와 소통한다. 그러나 우리가 소통이라 부를만한 순간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 다른 존재의 언어와 행동을 그저 해석할 뿐이다. 그들의,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내가 직접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던져진 물수제비에 내 감정의 파도가 요동칠 뿐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아주 오래전 이런 말을 남겼고 여전히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왜 너만 쏙 빼놨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을, 구별되지 않는 그 검은 덩어리들을 존재라 부르는 그곳에서 데카르트는 너라는 존재도 포함시켰을까? 어두운 저녁 길을 걷다 보면 상대방의 그림자가 내 몸에 포개지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그림자를 품고 또 누군가는 나의 그림자를 품는다. 누구의 그림자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저 포개질 뿐이다. 존재는 신기하게 어두운 곳에서 피어나 따스함을 남긴다.
그곳엔 온통 그림자만 있었다. 그곳은 어둡다기보다는 따듯한 곳이었다.
그림자를 보고 문득 고마웠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꽤 많은 것들로 증명할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그림자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력적인 부분은 이 친구가 과묵하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 그림자가 함께 포개지기도 합니다. 그 모습이 서로를 안아주는 것만 같습니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또 내가 위로받는 게 어색한 순간들이 더러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면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닌데 나의 진실된 면모를 아직 보지 못하여 그리 말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내 존재라는 게 또 상대방의 존재 자체가 어색할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부정적인 의미로 그리 말하기도 하지만 정말로 궁금할 때도 있습니다. 지하철에 수많은 칸들에서 앉아 있거나 혹은 손잡이를 잡고 서있거나 하면서 하염없이 어딘가로 가는 이들. 그들이 내가 그렇듯 밥을 먹고 말을 하고 잠에 들고 한다는 게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든 말 못 할 감정을 느낄 때면 하나씩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무슨 생각하냐는 말에 ‘그냥'이라 답하곤 합니다. 그런데 길어진 해만큼이나 늘어진 그림자들이 서로 포개어진 모습을 볼 때면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적어 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곳곳엔 온통 그림자가 가득하지만 이를 따듯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기에 그림자만 있는 곳은 따스할 것이라 생각하고 한번 적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온통 그림자만 있는 곳에서 무얼 떠올리셨나요?
2주 뒤에는 “ 자꾸만 썼던 일기를 찢어 버리곤 했다. ”를 첫 문장으로 하겠습니다.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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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son
"존재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도 그럴까" 에 대한 고민을 하며 '그림자'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글을 읽으니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생각납니다 : )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나, 그림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빛이 있기에 그리고 감정의 팔레트..! 잘 읽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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