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서평] 잠자는 남자는 아무런 꿈을 꾸지 않아서 모든 꿈을 꿀 수 있다

잠자는 남자를 읽고

2022.04.26 | 조회 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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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일기

조용히 바라볼 때 사물이 저에게 들려주는 얘기를 전합니다. 격주로 한 주는 조용한 에세이를 다른 한 주는 조용한 서평을 보내드립니다.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

 

조르주 페렉의 소설은 내가 여태까지 읽어나갔던 서사가 뚜렷한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조르주 페렉의 소설은 읽는이로 하여금 새로운 독서법을 가지게 한다. 잠자는 남자라는 제목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인과가 뚜렷한 서사를 요구하는 세계로부터 저항을 하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나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설이 주는 의미를 파악하고 도출하려고 할 텐데, 잠자는 남자는 그 어떤 의미도 독자들에게 선사해주는데 도무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네가 눈을 감자마자, 잠의 모험이 시작된다. (p.13)

이렇게 말하면서 소설은 시작되고 있다. 소설 초반에는 시험장에 가지 않은 남자가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게 되는 풍경이 묘사되고 있다. 재밌는 지점은 남자가 잠을 자면서 시험장에 가지 않는 장면을 선택하는 것처럼 되풀이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소설과 달리 잠자는 남자는 어떤 인물을 만나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잠자는 남자가 하지 않는 것을 지켜보면서 독자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잠을 자지 않을 때 남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거리를 배회하는 데 쓴다. 거리를 배회하는 과정에서는 풍경을 나열하는 방식이 자주 쓰이는데. 앞의 문장과 그다음의 문장에서 겹쳐지는 풍경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보면서 재미를 느꼈다. 마치 카메라가 인물의 시선을 천천히 비추듯이 묘사 과정은 아주 촘촘하게 이루어져 있다.

너는 혼자다. 너는 홀로인 사람처럼 걷는 법을, 한가로이 산책하는 법을, 주시하지 않고 바라보는 법을, 바라보지 않고 주시하는 법을 배운다. 너는 투명성을, 부동성을, 존재하지 않기를 배운다. 너는 하나의 그림자가 되는 법과 마치 돌멩이라도 된다는 듯 사람들을 쳐다보는 법을 배운다. 너는 앉아 있는 채로 있는 법을, 누운 채로 있는 법을, 선 채로 있는 법을 배운다. 너는 한입마다 꼭꼭 씹어 먹는 법을, 네가 네 입에 가져가는 소량의 음식에서 한결같이 무미건조한 맛을 발견하는 법을 배운다. 너는 화랑에 전시된 그림들을, 마치 벽의, 천장의 일부라도 된다는 듯이 바라보는 법을, 벽이나 천장들이, 그것들이 마치 네가 피로를 느끼지 않고도 열 점 이상을 좇을 수 있을 화포나, 늘 다시 시작된 수천 갈래의 길이나, 피해갈 수 없는 미로나, 그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텍스트나, 일그러지는 얼굴들이라도 된다는 듯이,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p. 49)

이때 남자는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무연하게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본다.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려고 한다. 마치 식물이나 사물이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처럼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때 비로소 세계가 남자를 향해 시각적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상에 대해서 쉽게 해석하지 않는 마음을 통해서 잠자는 남자는 그 세계가 스스로 자신에게 오고 있는 것을 본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잠자는 남자에 대해서 명확하게 어떤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의 시선에서 말하는 그 모든 이미지가 잠자는 남자를 말해줄 수 있는 과정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한 사람의 직업이나 그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그를 정의하고, 말하려고 하지만. 조르주 페렉은 잠자는 남자를 그런 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서 보여준다. 잠자는 남자가 보는 방식으로 우리가 세계를 보도록, 그러면서 그가 이끄는 잠의 세계로 우리를 아주 천천히 자연스럽게 이끌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어렸을 적에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방식이 조르주 페렉이 우리에게 잠자는 남자를 소개해주는 과정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가 어떤 직업과 사회적 위치를 가졌는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어렸을 적에 그 친구가 보는 세계를 믿고 따라가 보는 순수함이 있지 않았나.

그가 컵을 쥔 동작이라든가 그가 입은 옷의 무늬, 그의 달라진 헤어스타일, 그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 그가 키웠던 강아지, 그가 가지고 있는 공의 모양 같은. 아주 구체적이기에 그 사람일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잠자는 남자도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는 과정은 잠자는 남자와 진정한 친구가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지만(우리가 만약에 진정한 친구와 대화를 할 때는 그의 사소한 모든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가 된다), 그가 하는 아주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모두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된다.

소설을 처음 배울 때는 인물의 결핍과 함께 인물을 추동하게 하는 사건을 개입하려고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소설이라든가, 시라든가, 무언가를 표현하는 방식은 결핍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놀이의 방식과 장면을 찍어내는 생산의 방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다. 그 놀이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기 보다는 그 놀이의 지속 장면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집요하게 찾으려고 하면, 어느 한 순간도 즐길 수가 없게 된다. 우발적으로 생겨나는 풍경들을 보고 관조하며, 그 풍경 속에 있는 나를 천천히 바라보는 것. 그럴 때면 의미라는 것은 한 없이 지연이 된다. 또한 하루라는 것이 하나로 귀결되지 않고 수 없이 미분화되어서 모든 장면들이 생생한 음악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 음악이 좋든지, 좋지 않든지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가 수 없이 많은 음악들 사이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가끔은 한 사람을 볼 때면 어떤 음악이 들려온다. 장면들이 뚝뚝 떨어져서 바닥에 닿고 다시 튀어오르고. 다시 장면들이 공처럼 떠올라 이어지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결정적인 장면과 공의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하지만, 이제는 장면이 스스로 움직이게 공이 스스로 흘러가는 대로 가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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