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앞에 컵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그 컵은 당신이 원하는 형태와 색깔로 변해간다. 컵은 용도를 가지고 태어났을 수도 있지만, 지금 막 당신이 그 용도를 정할 수도 있다. 그 컵에 무엇이 담기는 가에 따라서 그 컵과 함께하는 하루의 기분은 변해갈 것이다.
나는 하얀 커피잔을 산 적이 있다. 그건 순전히 커피잔에 커피를 따라 마시면 더 좋은 맛이 느껴질까, 하는 궁금증에서였다. 고급 커피도 아니고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파는 인스턴트 커피를 나는 자주 집에서 마신다. 인스턴트 커피 가루를 하얀 커피잔에 붓고, 전기포트의 끓인 물을 부었다. 커피잔은 여러모로 유용했다. 둥근 커피잔에 물을 80프로 정도 부으면 최적의 커피 맛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을 얼마나 부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납작하고 작은 접시처럼 보이는 커피 받침대에 커피잔을 내려놓을 때마다 탁, 탁, 탁 나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오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작은 음악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커피잔이 부딪힐 때마다 출렁이는 검은 커피가 흘러나와서 하얀 커피잔에 미세한 얼룩을 남겼다. 얼룩이 묻자 커피잔의 하얀색은 더 뚜렷해 보였다.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공상을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음영이 커피잔에 담기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소리를 낼 때마다 나의 상황도 바꿨다. 하루가, 한 달이 지나갔다.
컵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어떤 음악이, 춤이 시작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게 비록 프랜차이즈 카페의 컵이라도.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컵은 우리를 여러 테이블로 인도하다. 그 인도된 테이블에서 컵은 한 사람이 시킨 음료를 담은 채로 맞은편 사람을 바라본다. 그렇게 컵의 손잡이는 또 다른 우리의 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용할수록 그 컵과의 악수와 마주침은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그 컵이 깨지기 전까지. 아니, 깨진다는 생각을 못한 채로 컵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리며 빙글빙글 돌고 돌 준비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떤 컵을 어느 시간에 만나는가에 따라서 컵의 구심력으로부터 우리의 춤은 달라진다. 컵이 내려놓을 때마다 바로 앞의 사람이, 우리가 앉은 장소가, 우리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컵을 내려놓을 때마다, 상대방에게 보이는 나의 얼굴이 달라질 수도 있다.
절대 지워질 수 없는 얼룩과 작은 깨진 자국을 가진 컵은 물기가 말려진 채로 나를 바라본다. 그때 컵은 무언가를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컵의 시간은 쉽게 씻겨나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몸을 씻을 때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점이 생겨 지워지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처럼. 완전히 말끔한 상태로 컵과 우리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내게 컵을 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 사람은 단순히 컵을 선물해 준 것이 아니라 컵과의 빙글빙글 도는 새로운 춤을 선물해 준 것이다. 때로는 다시는 출 수 없는 춤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춤을. 선물 받은 컵을 작은 종이 상자에서 꺼내는 순간부터 새로운 음영이 컵에 생길 것이다. 내 방의 풍경이 모두 그 컵에 담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 컵은 내가 잠을 잘 때 둥둥 공기에서 스스로 떠다녀서 아름답고 따뜻한 꿈을 내게 붓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침에 깨어나서 나는 나의 꿈을 다시 그 컵에 붓게 된다. 컵은 나를 변형시키고, 나는 컵을 변형시킨다. 매번 씻기고, 닦이고, 잡히면서 컵은 새로운 상태를 나와 함께 꿈꾸고 있다.
건조대에 놓인 컵은 얼굴처럼 나를 보고 있다. 아기 코끼리 점보가 그려진 컵, 파란색 르쿠루제 컵, 올해의 색으로 선정되었다는 푸른색의 팬톤 컵, 개쳐먹동이라는 글씨가 적힌 모임에서 받은 유리컵. 모두 선물 받은 컵이다.
아기 코끼리 덤보가 그려진 컵은 소설 쓰는 유나 씨가 내가 덤보를 닮았다고 선물해 주었고, 르쿠루제 컵은 등단 기념으로 소설 교수님이 선물해 주었다. 푸른색의 팬톤 컵은 시 쓰는 연덕이가, 개쳐먹동 컵은 소설 쓰는 동현이 형이 선물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모두 글쓰는 사람들이 선물해 준 가지각색의 컵을 번갈아가면서 쓰면서 나는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그 컵 안에 담을 것을 생각하면서, 빈 노트에 글자를 채워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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