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모순과 역설

논리와 구조의 경계를 넘어

2024.03.04 | 조회 1.2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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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지도 그리고 읽기와 쓰기

철학적 개념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리듬에 발맞추기

모순과 역설의 진리값

모순을 표현하는 간단한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문장이 모순이 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이 문장이 참이라면 문장에 따라 그 자체가 거짓이어야 하고, 반대로 이 문장이 거짓이라고 해도 거짓의 거짓은 참이기 때문에 한 문장 내에서 완벽하게 상반되는 두개의 진리값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순이 모순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하나의 주장에 상반된 진리값이 공존해야만 합니다.

반면 역설은 조금 다릅니다. 역설은 모순된 진리값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존재하는 경우도 있지요). 예를 들자면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역설이 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100m 가는 동안 거북이 10m을 간다고 가정하고, 거북이가 아킬레우스보다 100m 앞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상태에서 아킬레우스가 거북을 따라잡기 위해 100m 앞으로 갔다고 하면 동시에 거북은 10m를 나아간다. 그러면 거북과 아킬레우스는 10m만큼 떨어져 있는데, 이 때 아킬레우스가 다시 10m를 더 나아가면 거북은 1m를 이동하여 거북이 다시 1m 만큼을 앞서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킬레우스가 다시 1m를 가면 거북은 0.1m 더 나아간다. 따라서 아킬레우스는 아주 미세한 거리만큼을 항상 뒤처지게 되므로 아무리 가까워져도 거북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

제논의 역설 :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여기에는 어떠한 논리적인 모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주장이 참인 진리값을 갖고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설은 수학사적으로 논리주의의 믿음을 파괴한것으로 유명합니다. 논리학에서 가장 잘알려진 추이성인 삼단논법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죠. 삼단논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A는 B이다.
B는 C이다.
따라서 A는 C이다.

삼단논법

이 무적의 삼단 논법의 결론은 앞에서 전제된 두 명제의 참값에 의해 자명하게 증명됩니다. 마찬가지로 아킬레우스의 역설 또한 귀납 원리에 의해 반복되는 모든 주장이 참이기 때문에, 그 추이적인 결론도 참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수학 = 논리'라고 믿어왔던 시대에 이 아킬레스의 역설은 무한 극한개념이 없던 수학계에 큰 충격을 던진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수학사는 수학의 가치가 논리의 완전성에 있다고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맥락적 차이와 역설의 가치

모순과 역설은 매우 유사해보이지만 차이가 존재합니다. 모순은 앞서 말했든, 하나의 명제가 만들어내는 진리값의 참과 거짓이 공존할때 나타나는 현상이며, 역설은 진리값의 대비가 나타나는가보다 예측되는것과 상반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상반된 진리값의 도출이라는 증명과정이 요구되며 진리값이 명백하게 드러났을 때, 그것을 모순이라고 합니다. 반면 역설은 예측되는것과 상반되는 결과가 도출될 때 발생하는것으로, 모순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을 철저히 제한하고 체계 내부로 포섭하여 주장을 진리값으로 해체 변환시켜야만 합니다.

만약 어떤 표현이 범맥락적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특정 맥락에 포획되기 어렵기 때문에 역설을 찾아내기는 쉬우나 모순을 찾는일은 결단코 쉬운일이 될 수 없습니다. 범맥락적 표현은 그것이 걸친 맥락들 사이를 탈주해내는 중간 어느지점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이곳에도 저곳에도 있지 않은 상태이면서 동시에 이곳에도 있고 저곳에도 있는것을 말합니다. 그를 아울러 모순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양 맥락마저 추상화시켜낸 영토를 발견하고 그들 모두에게서 모순을 유발시키는 진리값을 만들어낸 체계 또한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운점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모순이라는 표현은 그 사용성의 맥락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 자주 사용되지 않습니다. 탈주선이 발견된 이상 특정 맥락이 신뢰하는 믿음들을 얼마나 추상화시키고 이탈시켰는지 측정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현대사회가 차이자체, 다양성을 마주한 이상 그들에 대한 존중의 시작은 모순을 찾아내는 활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가진 언어가 만들어내는 맥락의 정체를 찾아내는 일이 우선시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맥락적 정체를 찾아내기 힘들 때 현대인들이 즉각적으로 자주 쓰는 표현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소통이 어렵다'. '전제가 다른것같다'. '생각해 보겠다'이지, '모순이다'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범맥락적 표현에 대해 그 어떤 체계조차 구축하거나 추상화시키지 않은채로 모순을 선언하는 일은, 그 표현이 의미하는 탈주선을 절단하고 특정 체계로 포획하는 지배력의 행사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순은 맥락내부에 공리계가 폐쇄되어있을때만 온전히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 지배력은 때로 권력적 우위를 차지하는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탈주선을 잘라냈다는 지점에서 사유적 고립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순의 현대적 사용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마찬가지로 상대의 논리 그 자체에 대한 동의 속에서 맥락적 공리계를 드러내게 하며, 그 공리계의 체계에서 참과 거짓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드러난 모순은 명명백백하게 오히려 너무나도 자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역설은 모순과 맥락상에서도 차이가 존재합니다. 모순은 체계 내부에서 작동하지만 역설은 외려 체계 외부의것을 체계 내부로 들여오면서 발생되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수학사에서도 파괴적인 역설은 늘 수학사적인 발전을 이끌어내었습니다. 현대 수학사에서 러셀의 이발사 역설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이어지며, 체계 논리의 불완전성을 그대로 드러내어 모든 체계에서의 탈주선의 필요성을 수학적으로 열게 했습니다. 이것은 들뢰즈가 지향했던 유목적 사유의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해내는 일에 가까웠으며, 모든 체계는 닫힌 순간 외부의 차이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로 고립되고 굳어진다는것을 암시했습니다.

현대 수학이 '구조주의'라고 불리우는데는 이런 탈맥락적 증명들에 의해 체계의 폐쇄성을 벗어던지고 탈주선을 받아들여 가능한 모든 구조를 탐구해내기 위한 노력을 행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철학이나 사회학의 구조주의와 그 궤를 달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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