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형이어서 그랬을까? 좋아하는 일에는 굉장한 열정이 살아있었던 것 같다. 첫 직장은 외국계 컴퓨터 회사 고객지원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그 당시 일이 즐겁기는 했지만, 정직원들과 계약직 직원들과의 대우가 확연히 달랐다. 약간 계약직원들을 투명 인간 취급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정직원으로 갈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정직원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대학 동기로부터 전화가 왔다. 벤처기업으로 인터넷 서비스 제공회사가 있는데 같이 그 회사에 지원하자고 권유했다.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정규직인지 계약직인지였다. 그만큼 정직원과 계약직원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고 설움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규직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사실 고객지원으로 고객 상담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 정확히는 언변이 좋지 못해서 다른 분야로 취업하고 싶었지만,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우선 성적이 너무 안 좋았고 또 전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은 내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전산 전공이라기보다 전산 교양학과를 나왔다고 해야 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 당시는 인터넷 서비스가 상용화되기 전이었다. 지금처럼 와이파이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이 아니었고 과거 통신서비스였던 하이텔, 천리안처럼 전화접속을 해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거기에다가 나는 서버가 되는 큰 컴퓨터인 워크스테이션에 물려있는 단말기에서 텍스트 기반으로 인터넷을 사용했는데, 상용화 예정인 서비스는 윈도우즈 환경에서 WWW(월드와이드웹)을 사용해서 화려한 이미지들을 함께 볼 수 있어서 정말이지 획기적인 서비스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 회사라면 충분히 도전해 볼만했고 전산 전공을 했던 나는 학부 3학년부터 학과 실험실에서 인터넷을 사용했었기에 나 또한 어느 정도 승부수를 던질만하다고 판단되어 고객지원 분야에 이력서를 냈다.
아무래도 외국계 회사의 고객지원센터에 근무하다 보니까 아무리 계약직이더래도 경력이 인정되었던 것 같다. 성적은 안 좋았지만, 면접에서 여러 질문에 대답을 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이지 그 회사의 고객지원 1호로, 꿈에도 그리던 정규직원으로 입사했다.
회사는 한창 서비스 준비 중이어서 고객지원 부서가 아직 없었다. 엔지니어들이 대신 개발 업무와 함께 고객 응대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개발팀에 또아리를 틀고 일했다. 개발팀에 속해서 나도 윈도우즈 기반의 인터넷을 공부했다.
그런데 서비스 매뉴얼이라고 하는 프린트물을 보니 살짝 어이가 없었다. 서비스 매뉴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름했다고 할까? 설명도 어려울뿐더러 찬찬히 뜯어보니 엔지니어 직원분이 만드신 건데 사용자 입장의 쉬운 매뉴얼이 아니라 공돌이 냄새가 폴폴~ 풍기는, 상당히 기술적인 매뉴얼이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문서화하고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팩스를 보내는 서비스 안내문, 서비스신청서, 인터넷 접속하는 법, 월드와이드웹 사용법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직원들 가운데 특히 기술개발팀, 운영팀 등은 전문 엔지니어들이 도맡고 있었다. 그들은 근무시간도 9 to 9을 넘어서 9 to 11일 때도 있고 시스템 업그레이드로 밤샘 작업을 하기도 했다. 믿지 못하겠지만 사무실 내 흡연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엔지니어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나도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나도 꽤 오랫동안 9 to 9으로 일했다. 그래도 피곤함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녔다.
무엇보다 정직원이 된 것이 기뻤다. 더욱더 기뻤던 것은 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인터넷을 장난감처럼 사용하던 추억이 있기에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지금에야 고백하지만, 일요일인 주일에도 교회 예배를 오전 7시 반에 드리고 회사에 출근했다. 누가 나에게 공휴일 출근을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인터넷이 좋아서 자진해서 회사에 출근했다.
몇 개월이 지나 고객지원팀에도 3명의 팀원이 새로 들어와서 번듯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방음을 위해 150센티 높이의 버티컬 칸막이가 생겼고 고객지원에 필요한 전문적인 콜 전화기들이 책상마다 놓였다.
나는 고객지원 1호인 선배 직원으로서 팀원들에게 한 달간의 강훈련으로 인터넷을 교육했고 팀원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상담 문의 전화와 고객의 불만 전화 처리도 후속 라인에서 처리했다. 심지어 외국인을 대상으로한 전화상담과 가이드작성도 함께 했다.기본적으로 이메일 문의 답변과 각종 문서 관련 업무도 진행했다.
벤처기업인 데다가 인터넷 서비스 초창기였기 때문에 회사의 엔지니어들이 일당백으로 여러 업무를 도맡아 했다. 나도 그에 동참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고객지원의 여러 가지 업무들을 감당할 수 있었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법적으로 토요근무가 있던 때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일이 즐거웠다. 개발팀의 팀장님은 ‘내가 영심이라면 돈 내고 회사 다니겠다’라고도 말씀하실 정도로 즐겁게 다녔다.
정말이지 그때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원도 없이 월급을 받아 가며 열정적으로 일했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경제 지각이 바뀌게 된 1998년 IMF 외환 위기 전의 일이다.
<영심이의 오뚜기 인생: 필자 소개>
살아오면서 다양하게 굴곡진 삶을 당당하게 맛보며 살아온 그녀. 1990년대 만화 캐릭터 영심이처럼 밝고 활기차게 그리고 힘겹지만 가뿐하게 어려움들을 이겨냈다. 다양한 삶을 살아온 만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깊이 공감할 수 있기에 더욱 행복하다. 2022년 세움북스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매일 SNS에 글을 올려왔고 2024년 <쓰고 뱉다 23기생>이 되면서 그녀의 글은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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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니신나
그때의 행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 잘 읽고 갑니다^^
영심이
감사해요~~ 늘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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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피어
늘 열정적으로 살아내시는 영심이님의 삶을 통해 나의 삶도 점검하게 됩니다.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열정을 배웁니다. 좋은 글,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우리는(=^ᴥ^=)
영심이
감사드려요^^ 비가 많이 오네요, 건강하시고 무탈하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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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
결은 다르지만 IT관련 업계에서 적은 보수로 모든 열정을 갈아넣던 옛 생각이 납니다요. 열정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제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 같아요.
영심이
네 맞아요, 그땐 진짜 열정이 많았던 것 같아요~~ 아련한 추억이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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