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과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 하나
복음서 성경을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을 집에 초대했는데 마르다는 최고의 대접을 해드리기 위해 분주하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집중해서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그 상황에서 마르다가 보인 반응이다. 분주한 마음에 예수님께 가서 마리아에게 자신을 좀 도우라고 말해달라고 이야기하는 마르다의 반응에 예수님은 오히려 ‘가장 좋은 것 하나를 택한 마리아’의 행동이 옳다고 가르치신다.
나는 이 말씀을 듣거나 볼 때, 매번 ‘마르다’와 비슷한 내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신입시절부터 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다들 누리러 가는 수련회에서도 나는 기획하고 진행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두 부서를 오가며 2배의 일을 하면서 산다. 낮 시간안에 해야할일을 다 끝내야 하다보니 나는 늘 분주했다. 퇴근하고 육아출근을 하고나서도 나를 기다리는 건 해도해도 매일 생겨나는 집안일, 또 일이었다. 주말에 교회 사역까지 더하면 3배, 4배의 삶을 사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난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돌아보면, 그동안은 부르심 따라 부부가 각자의 사역을 잘 감당하는 것, 그리고 귀한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나의 우선순위였다. 서로가 바쁜 사역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타이트하게 육아교대를 해야했다. 매주 우리 부부는 시간을 조율하고 사역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힘에 지나게 애쓰던 것이 어느새 두 해가 됐다. 나는 업무와 사역, 육아 외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건강과 체력 관리를 위해 운동을 했고, 자기개발도 하면서 짬나는 시간을 꽉꽉 채워 살았다.
‘좋은 것’을 선택하며 최선을 다해 2년을 꽉꽉 채워 살면서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보이지 않는 균열이 삶에 생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열심히 살면서도, 아니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자주 지쳤다. 번아웃이 오는 주기가 점점 짧아졌고, 아이가 성장하면서 자아가 생겨날수록 늘어나는 투정과 짜증을 받아낼 마음의 힘이 자주 소진됐다. 우리 부부는 서로 자주 지치고 예민해졌다. 서로 소통할 시간이 없는 만큼 오해하고 미워했다. 하루에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오늘 하루 분담해야할 육아와 집안일 리스트가 다였다. 나의 마음에는 답답함과 우울이 꽉 들어차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를 좀 위로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지만, 그 필요를 티낼수도 채울수도 없이 시간만 흘렀다. 결국, 내 마음에는 ‘무기력’이 찾아왔다. 그 어느것도 하고싶지가 않았다. 정말 제대로 번아웃이 온 것이다.
도무지 내 힘으로 이겨낼수 없을때가 되서야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에는 가족예배공동체 모임이 있다. 우리 부부는 신혼부부 세 가정과 함께 한달에 한번 정기 모임을 갖는다. 모임 시간에는 팀켈러 목사님의『결혼을 말하다』를 요약한 유인물을 같이 읽고 나눈다. 최근 모임의 주제는 ‘부부는 가장 친한 친구’ 라는 것이었다. 부부는 우정위에 로맨스를 더한 사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보다 서로가 우선순위여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이 내용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들렸다. 그리고 마음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우리 부부가 함께 부르심 따라 사역하고 아이 보느라 우선순위를 두느라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열심히 사는데도 우리의 삶에 왜 균열이 생긴 것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서로를 위한 우선순위를 자녀를 위한 우선순위보다 먼저 두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더 중요한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는 바람에 우리는 아들에게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을 오히려 주고 말았던 것이다. 가령 바쁘고 서로 대화도 없는 부모의 모습 같은 것 말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고나면 엄마는 우선순위가 바뀌어서 아이가 가장 먼저이고, 그 다음이 자신, 그리고 에너지가 남으면 남편이 그 뒤일 것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다 큰 아이에게 물려줄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사이가 좋은 부모의 모습과 건강한 엄마였다는 걸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처음 이 글을 봤을 때는 머리로는 알지만 그러기 쉽지 않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위안했었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그 말이 정말 뼈저리게 맞는 말이었다.
또 하나, 가족 안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은 서로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예배를 드렸던 몇달이 서로가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멈춰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돕고, 우리 가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중요한 시간이 됐던것이 생각났다. 그렇게 남편과 나는 다시 가정에배를 세워가기로 했다.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평소에 나누기 어려운 서로의 마음을 깊이 나누고, 우리 가정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다시 기억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길고 긴 번아웃의 시간을 겪고나니 주님의 말씀이 이제야 선명이 들리기 시작한다. 간사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위해 하는 ‘일’들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과 눈이 누구에게 향해 있는지를 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듣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것이 가장 좋은 것 하나이니 그것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택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청년들을 섬기고 아이를 돌보는 ‘좋은 일’에 우선을 두고 최선을 다했지만, 주님은 ‘더 좋은 것’ 하나를 택하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며 다시 한번 우리 가정을 이끌어가신다.
이런 깨달음은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신입간사 시절, 열매가 안 보이는 사역 현장에서 나는 매일마다 울면서 주님께 물었었다. "주님, 제가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사역에 열매가 보입니까?"라고. 그때 주님은 ‘나의 안에 거하라’ 라는 찬양으로 응답해주셨다. ‘너는 내 자녀이니 내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때까지 하나님을 마치 나의 사장님인것처럼 오해했던 것 같다. 내 사역의 결과를 평가하시는 분인 것처럼 착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이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여전히 나는 세상의 논리처럼 사역에 임할때가 있다. 일을 많이 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는 것. 내 재능을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갇혀버릴 때가 있다. 마치 그게 내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길의 전부인것처럼. 사역의 열매가 보이지 않으면 주님께 더 나아가야 하는데, 내 습성은 정반대로 내가 무언가를 더 열심히 하는 쪽으로 가려한다. 그때마다 주님은 내 마음의 중심을 물으신다. 지금 내가 힘을 쏟고 있는 큰 프로젝트 사역보다는, 그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잘 살아내고 있느냐고 잠잠히 물으신다.
마르다는 ‘doing’에 집중했고 마리아는 ‘being’에 집중했다. 주님도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많이 하는 것보다 우리의 존재를 주님께 온전히 드리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신다. 작은 반딧불이 어둠 속에서 작지만 분명한 빛을 내듯이. 내게 주어진 존재만큼의 작은 빛이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신다. 다시 한번 빛이 되신 주님께 붙어 있기로 한다. 그래야만 엄마도 간사도 아내의 삶에도 빛이 다시 드리워질 것이다. 내가 해야할 ‘가장 좋은 것’ 하나는 주님께 붙어 빛을 내는 것, 그것 하나이면 족하다는걸 다시한번 마음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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