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는 아이돌에게 중요한 키워드다. 어린 사람의 성장 과정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것이나 아이돌을 소재로 한 서사 창작이 아이돌 향유의 대단히 중요한 축을 이루는 것을 보면 그렇다. 향유자에게 비현실적인 신비로움을 선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팬덤 내에서 서사 창작을 통한 캐릭터 소비를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잡은 케이팝 아이돌 분야가 음악을 통한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그런 면에서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글은 아이돌과 스토리텔링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아이돌 개인의 인생사를 가공하는 기획이라면 곧 이전 편에서 말한 자전적 면모를 강조하는 기획의 일종이므로, 이번 글은 아이돌이 가상의 배경에서 캐릭터를 연기하는 기획을 주로 살펴볼 것이다. 콘셉트, 캐릭터, 세계관, 연작 등과 함께 등장하는 갖가지 스토리들을 떠올리면서 글을 읽으면 좋다.
캐릭터 위주의 서사
통상적인 아이돌 팝 음악을 하나 떠올려 보자. 그 음악의 가사에는 대체로 어떤 화자가 있고, 그 화자가 어느 상황 속에서 어떤 감정을 갖고 말, 생각, 행동을 한다. 그 말, 생각, 행동, 감정이 언어로 표현되어 우리 귀로 들리는 것이 곧 음악이다. 이처럼 원래 대중음악 가사, 특히 작사/작곡자와 가창자가 분리된 것으로 가정하는 분야의 가사는 대체로 약간의 서사를 담고 있다. 워낙 분량이 짧고 극도로 패턴화되어 있다 보니 의식을 못 할 뿐이다.
그래서 음악을 통해 스토리텔링에 본격적으로 임하려는 이들은 대체로 분량을 확보하기 위해 앨범 단위의 서사를 구성하거나 연작을 기획한 뒤, 서사에 주목해 달라고 다양한 방식으로 어필한다. ‘스토리텔링에 방점을 두었다’고 라이너 노트를 작성하거나 보도자료를 내는 것은 물론,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컨텐츠를 통해 청자가 서사에 몰입하도록 의도한다. 특히 아이돌 음악의 스토리텔링은 서사의 요소 중 캐릭터에 대단히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영상과 무대를 통해 가사 속 캐릭터의 강렬한 장면을 보여준 뒤, 그 장면을 머릿속에 심어둔 채 가사의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도록 의도하는 것이다.
캐릭터에 집중하여 가사를 읽어내도록 의도한 작품의 예로는 가인의 “Hawwah” 앨범이 있다. 섹시 콘셉트 여성 댄스 가수의 레퍼토리이기도 한 금기에 대한 유혹을 가사에 담고, 비주얼을 통해 성경 등장인물 하와를 화자로 내세워 보다 방대한 컨텍스트를 연상하도록 의도했다.
김이나 작사가는 “Hawwah” 앨범의 ‘리릭 프로듀서’ 직함을 맡아 유기적인 스토리텔링에 기여했고, 이처럼 자신들이 의도한 바를 라이너 노트를 통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프로듀서가 이미 만들어진 곡을 연결하는 작업으로 유기성을 확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보니, 기획 의도를 가사만 보고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타이틀곡 ‘Paradise Lost’의 뮤직비디오와 무대에 등장한 하와의 야성을 머릿속에 심어두고 가사를 읽으면 나름대로 줄거리를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스토리텔링을 중시한 아이돌 앨범 다수가 비주얼 콘셉트 속 캐릭터를 앨범 수록곡 가사의 주인공으로 대입시켜 읽도록 제작된다. 케이팝 시장 확대와 함께 나날이 더 많은 사람이 한 앨범에 참여하는 추세 속에서, 가창자의 캐릭터를 앨범 수록곡들의 접점으로 삼는 것이 앨범에 서사를 부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탓이다. 어차피 가창자의 캐릭터를 다각도로 즐기는 것이 아이돌 향유의 기본 목적이니, 캐릭터를 극대화하기 위한 스토리텔링이 아이돌 제작에 도입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N부작의 힘
아이돌의 스토리텔링에 있어 살펴보아야 하는 포맷으로는 ‘OO 3부작’ 등의 연작 앨범 기획이 있다. 앨범마다 활동 콘셉트가 바뀌는 케이팝 아이돌 업계에서 유사한 궤적의 사운드, 콘셉트, 대주제를 장기간 내세우려면 내부에서의 변주가 필요하기 때문에, 보통 연작 기획은 나름대로의 스토리라인을 가진다. 이하 연작들은 여러 개의 EP나 정규 앨범의 조합으로 이루어지지만, 스토리라인을 잇는 동력은 주로 무대를 통해 캐릭터를 각인시킬 수 있는 타이틀곡에서 나온다.
직관적 구성을 가진 연작의 예시로 여자친구의 ‘학교 3부작’이 있다. 뉴잭스윙에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연상케 하는 현악과 기타를 얹은 사운드와 풋풋한 스타일링으로 팀을 소녀풍 걸그룹의 계보에 배치한 뒤, 앨범 발매 시기와 비주얼 콘셉트를 일치시켜 학교생활-여름방학-졸업 순으로 줄거리를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오늘부터 우리는’의 활기와 여름방학의 낭만, ‘시간을 달려서’ 속 당장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과 졸업 시즌의 아련함이 같이 전해지는 식으로, 학교생활의 각 이벤트가 갖는 이미지와 가사의 감정선이 시너지 효과를 내며 큰 몰입감을 선사했다.
여자친구의 ‘학교 3부작’이 국면을 이어붙여 스토리를 전개했다면, 아이즈원의 ‘꽃 3부작’은 한 소재를 다각도로 조명하여 연작을 이루었다. 3부작 내내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일관되게 내세우면서 꽃이라는 소재가 가진 화사함과 화려함을 비주얼 콘셉트에, 각 꽃이 가진 이미지를 가사에, 꽃이 피어나는 과정의 역동성을 안무에 반영했다. 장미를 내세운 ‘라비앙로즈’와 제비꽃을 내세운 ‘비올레타’에 이어, 꽃의 축제 ‘피에스타’로 매듭짓기까지 화려함을 더하며 아이즈원은 단기간에 대형 그룹으로 성장했다.
두 연작의 공통점이 있다면, 해당 기획의 목적이 신인 그룹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데뷔 이후 1년 내외의 기간 동안 두 팀은 일관된 방향성의 레퍼토리를 조금씩 변주하며, 아이돌로서 궤도에 오르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연작의 스토리라인과 그룹의 성장이 겹쳐지며, 두 팀은 각각 힘찬 여학생과 화려하고 역동적인 꽃의 얼굴로 각인되었다. 두 그룹이 이후에도 각자의 첫 3부작으로 각인된 이미지를 기반으로 활동했음을 보면, 잘 짜인 연작이 그룹 커리어에 갖는 파급력은 막대하다.
판타지를 부르는 아이돌
음악 내외적으로 픽션을 제시한 뒤 아이돌이 픽션 속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여러 앨범에 걸친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은, 근래 많이 이야기되는 세계관 기획의 기본적인 전개 방식이다. 세계관 기획의 동력 역시 무대가 있는 타이틀곡에서 나오지만, 때에 따라 수록곡이나 인트로, 인터루드, 아웃트로 등의 트랙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한다.
세계관 기획은 대체로 그룹 활동을 뒷받침하는 가상 세계를 만들어주는 목적으로 쓰인다. 방탄소년단의 ‘화양연화’ 시리즈로 세계관 기획의 효과를 체감한 하이브는 이후 데뷔시킨 투모로우바이투게더와 엔하이픈에게도 데뷔 때부터 세계관을 만들어준 뒤, 현재까지 세계관 스토리텔링 기반의 음악과 활동을 선보이고 있다. “꿈의 장: MAGIC”, “BORDER: CARNIVAL” 등의 앨범명에서 볼 수 있듯, 세계관 속 어느 국면을 한 연작 시리즈의 대주제, 그 국면의 세부 전개를 각 앨범의 주제 및 콘셉트로 삼아 그에 따른 음악을 선보인다. 이 과정에서 두 팀은 스토리텔링 속에서 일관된 캐릭터를 여러 상황에 집어넣으면서, 그룹 정체성 유지와 콘셉트의 다양화를 함께 겨냥한다. 하이브 밖에서 비슷한 목적으로 세계관을 활용하는 사례도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사라진 소녀 찾기’의 과정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빌리가 있다.
한편 그룹의 구성 형태나 회사의 경영 방침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세계관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SM이 내놓은 EXO와 NCT의 경우, 큰 시스템 속 서브 그룹이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그룹 운영 방침을 ‘우주’나 ‘공감’을 키워드로 한 세계관을 통해 전달하였다. 에스파 ‘Black Mamba’, ‘Next Level’ 등의 경우, 애니메이션 주제가처럼 세계관 스토리 속 고유명사를 가사에 집어넣어, 음악 이해를 위해 반드시 세계관을 이해하도록 강제했다. SM 밖에서 같은 목적으로 세계관을 활용한 사례로는 순차 공개된 멤버가 유닛을 거쳐 완전체가 되는 과정을 세계관으로 설명한 이달의 소녀가 있다.
연작 여러 개 분량을 넘어 그룹 커리어 전체를 관장하는 장기 계획인 세계관 기획의 특성상, 세계관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것은 그룹 활동 및 경영의 안정성이다. 하이브가 대형 기획사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뒤 데뷔한 투모로우바이투게더와 엔하이픈이 데뷔 후 3~4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관 스토리텔링 기반의 음악을 내놓는 반면, EXO가 멤버 이탈에 따라 세계관을 재설계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기존 평행우주 세계관을 이어가는 데에 실패한 것을 보면 그렇다. 이처럼 멤버 이탈이나 경영진/키 스태프 교체에 따라 세계관 기획이 풍파를 맞고 무효화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커리어 시작부터 끝까지 세계관 기획을 이어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세계관 활용 목적과 무관하게, 스토리텔링을 우선시하는 팀들이 필연적으로 팬덤 위주의 음악을 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평행우주, 뱀파이어, AI 같은 것이 난무하는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사랑해줄 사람은 분명 판타지적 미감에 익숙하며 복잡한 개념 설정을 이해할 의지가 있는 이들일 테니까. 그러다 보니 이처럼 오타쿠적인 감수성이나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 세계관 전략에 대한 반감도 나오고 있지만, 어차피 아이돌은 팬덤이 크고 두터울수록 성공하는 직종이니 스토리텔링과 앞으로도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게 될 것 같다.
사람을 서사로 이해하기
케이팝 아이돌 산업의 확대 과정은 곧 음악에 스토리텔링이 고농도로 결합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캐릭터를 중심으로 서사 속에서 소비되는 케이팝 아이돌의 특성과 날이 갈수록 팬덤 지향적 산업으로 성격이 변모한 산업의 역사가 합쳐져, 현재의 케이팝 아이돌 산업은 스토리텔링을 음악보다 앞세운 기획이 넘쳐나는 업계가 되었다.
청각 매체인 음악이 서사를 무조건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을 일종의 서사 안에서 이해하고, 아이돌 산업이 인격의 어느 부분을 극대화하여 판매하는 이상 아이돌 음악은 결국 서사와 친해지게 되는 것 같다. 판타지 세계 속 아이돌을 보며 너무 놀라거나 당황하기 전에, 사람에게 서사가 갖는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다들 한 번은 서사에 몰입해 보고, 서사를 갖고 사람을 이해해본 적이 있을 테니까. 그 속성을 아이돌 산업이 좀 많이 키웠을 뿐인 거니까.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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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두이노
콘셉트가 정체성을 잡아먹은 대표적인 사례인 에스파와 이달소...에스파는 콘셉트 버리고 좀 호평받는거같고, 이달소는 애매한 포지션+운영미숙으로 작살난게 참 콘셉트라는게 무서운 양날의 검이네요
예미의 주제들 (38)
저는 광야 얘기 하던 시절 에스파를 보면서 이 팀의 하입이 사실상 회사 단위의 화제성을 한 팀에 다 몰아준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회사 단위 팬이 워낙 많았다 보니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했지만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고요. 이달소는…. 이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정말….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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