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명백한 비영어권 국가다. 대중문화 시장에서도 자국어 콘텐츠의 점유율이 영미권 콘텐츠의 점유율을 앞지르는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한국 시장에서 영어 가사 곡을 발표하는 일은 이례적인 사례로 주목받곤 한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영어 가사 음악을 내면, 청자들은 우선 이들이 영미권 활동에 대한 야심이 있는지를 궁금해 한다. 보아,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에 이어 방탄소년단의 ‘Dynamite’에 이르기까지,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을 위해 현지 언어로 된 곡을 낸 사례는 수두룩하기에 이런 사례는 한국 청자에게 익숙하다. 그 다음으로는 가수가 영어권 교포인지를 궁금해 한다. 랩 가사를 영어로만 적던 신화의 에릭이나 영어 가사 자작곡을 연이어 내놓고 있는 르세라핌의 허윤진처럼, 곡을 만들고 부르는 이가 교포 정체성을 갖고 자신이 쓰기 편한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 그 선택은 큰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영어권 교포도 아니고, 해외 시장에 대한 야심을 대놓고 펼치지도 않으면서 영어 가사 곡을 발매하는 이들도 있다. 그에 대해서도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 우선 한국어 가사의 부재에 대해 아쉬워하는 반응이 있다. 특정 노선 속 수많은 아티스트와 음악 중 굳이 한국 아티스트의 음악을 찾는 당위가 한국어 가사에 있다고 보고, 그래서 영어 가사 곡을 그러한 당위가 없는 음악이라 규정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이 중에서 이들의 영어 가사 곡을 꾸준히 듣고, 이들의 행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지지하는 관점을 풀어보려고 한다.
해외에서 자라, 해외 청중을 더 많이 만나는 뮤지션
우선 ‘교포’의 영역을 조금 넓혀서 이야기해보자. 앞서 이야기한, 영어권 교포로서 영어 사용이 정당화되는 이들의 경우 상당수 국적이 미국이다. 국적이 한국이더라도 성장기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사실이 알려지거나, 한국어가 서툰 모습이 매체에 노출된 경우가 많다. 그 말은 즉, 한국어가 유창한 이들이나 해외 거주 이력이 짧은 이들, 혹은 영미권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살다 온 이들의 해외 거주 이력은 앞서 이야기한 영미권 교포의 해외 거주 이력에 비해 눈에 덜 띈다는 이야기이다.
영미권 이외 다른 국가에서 성장한 한국 유명 뮤지션으로는 오혁이 있다. 오혁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초, 중, 고등학교를 중국에서 졸업했다. 한국에서 밴드 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도 해외 거주 경력이 긴 탓인지 한동안 한국어 작사를 어려워했다. ‘위잉위잉’, ‘TOMBOY’ 등 한국어 가사로도 큰 주목을 받았지만 혁오의 앨범 수록곡 절대다수는 영어 가사로, 활동 경력이 쌓인 이후에는 ‘LOVE YA!’와 ‘Help’ 처럼 영어 가사로 된 타이틀곡을 발매하여 흥행하기도 했다.
1993년생인 그는 자신의 세대를 ‘유튜브 세대’라 칭하며, 유튜브에 검색하면 지구 반대편 일도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자라 어디에서 성장했는지가 크게 의미 없는 세대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중국에서 자랐지만 영미권에 기반을 둔 음악과 패션을 선보이고, 독일 등 해외 각지에서 음악을 작업하는 그를 보면 그의 세대 규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다만 그가 당시까지의 한국 인디 록과 확연히 다른 접근법과 질감의 음악을 한 것과, 그가 한국 밖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이 전혀 무관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혁오는 한국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뒤,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에 출연하고 월드 투어를 도는 등 해외 공연 시장에서 입지를 쌓는 모습을 보였다. 투어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 혁오의 유료 공연 비중은 국내보다 해외가 훨씬 커졌다. 마침 해외 투어의 비중이 높아진 시점과 타이틀곡마저 영어로 쓰기 시작한 시점이 같다. 비록 혁오가 미국 등 해외 차트를 노리는 지위에 있지는 않지만, 해외 공연을 통해 많은 청중을 만난다는 사실이 이들의 음악과 무관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외국 문화를 편집하는 한국인
오혁은 자신 및 자신 세대의 초국적적인 문화적 토양을 이야기할 때 인터넷과 유튜브를 중요하게 이야기했지만, 정작 그를 읽어낼 때는 해외에서 성장한 그의 배경과 해외 투어 비중이 높은 활동 이력을 생각하게 된다. 오히려 그가 말한 것에 더 정확하게 들어맞을 법한, 한국에서 해외 대중문화를 토양 삼아 성장한 아티스트의 사례로는 백예린이 떠오른다.
백예린은 2019년 발매한 ‘Square’를 통해 한국인 최초 영어 가사 곡으로 멜론 1위를 차지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해당 곡이 수록된 정규 1집 “Every letter I sent you.”는 18곡 중 17곡이 영어 가사인데, 발매 당일 앨범 수록곡 15곡이 멜론 차트에 진입하기도 했다. 백예린은 그 이후 정규 2집 “tellusboutyourself”, 그가 프론트우먼으로 활동하는 밴드 The Volunteers의 정규 앨범 “The Volunteers”의 가사도 영어로 채우며 한국에서 영어 가사로 음악을 내는 뮤지션으로 유명해졌다.
백예린은 커버곡 무대를 통해 자신의 관심 분야를 드러내 왔다. 온몸에 문신을 하고 R&B 음악을 부르는 모습과 에이미 와인하우스에 대한 샤라웃, The Volunteers의 90년대식 얼터너티브 록 음악과 오아시스 ‘Champagne Supernova’ 커버 무대, 소위 말하는 ‘시티팝’을 테마로 했던 “Our Love is Great” 앨범과 ‘La La La Love Song’ 커버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접점은 바로 과거 외국 부유한 국가의 음악계가 부흥하는 풍경과 그 가운데에 선 스타의 모습이고, 백예린은 바로 그 ‘스타’의 모습을 체화한 인물로서 ‘힙’의 극을 달린다. 그는 판타지를 온몸으로 선보이는 아티스트이기에, 앨범의 대부분을 영어 가사로 채워도 충분히 정합성을 가진다.
갖가지 음악들을 판타지라는 한 줄기로 묶어낼 수 있는 데에는, 백예린이 가진 21세기 한국 청년으로서의 위치가 작용했다. 2015년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는 아델의 음악을 ‘할머니들이나 듣는 음악’이라며 비난한 바 있는데, 이러한 발언에서 알 수 있듯 영국 현지에서 백예린의 양대 관심사는 정서적으로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지금 백예린이 보여준 것과 같은 행보는 해당 음악이 만들어진 시공간과 거리를 둔, 그러면서도 그 시공간과 일말의 관계를 이어 온 위치에서야 가능한 일이다. 자칫 연관성 없어 보이는 코드들을 한 테마로 묶어 새로운 의미를 붙일 수 있다는 점에서, 백예린이 한국에서 보여 온 여러 장르를 오간 행보를 단순한 영미권 음악 애호로만 볼 수는 없다.
지금 시대에는 21세기 한국에 살면서 1990~2000년대 영국을 예술적 뿌리로 삼는 아티스트가 충분히 탄생할 수 있다. 그리고 아티스트의 관점에서 그 자신의 관심 분야들이 청자에게 공통적인 감각을 선사하도록 병렬적으로 조합할 수도 있다. 그렇게 설득력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한국에서 영어 가사를 써도 문제 될 것은 없다.
그 담론의 고향이 한국이 아닐 때
2019년 발매된 백예린의 “Every letter I sent you.”가 영어 가사로 과거 영미권 음악계의 풍경이라는 판타지를 전달했다면, 같은 해 발매된 림 킴(Lim Kim, 과거 김예림으로 활동)의 “GENERASIAN”은 영어 가사로 지금 현재 동양 여성의 소수자성과 그로 인해 기인한 담론을 힘 주어 말했다.
“GENERASIAN” 앨범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아티스트가 발매한 앨범이지만, 그 담론의 발상지는 한국이 아니다. 동양 여성의 연대를 여러 나라의 이미지로 표현한 작업물에서 어떤 소리와 이미지가 어느 나라의 것인지 집어내는 한국 청자의 모습을 보면, 동양 여성이라는 소수자 정체성이 한국에서 탄생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이 정체성은 그 사회의 다수 인종이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구별할 의지가 없으며 이 모두가 한데 묶여 차별당하는 서구권에서 유효하다. 소수자 담론의 발상지와 그 담론이 겨냥하는 영역이 모두 서구 사회에 있기에, 림 킴의 말처럼 이 이야기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들어야 하기에 “GENERASIAN”의 가사가 영어로 적힌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다만 이 앨범 속의 이야기가 한국에서 기원한 것이 아닐지언정, 한국에 사는 다수자에게 같은 사람이어도 사는 곳에 따라 다수자도 소수자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GENERASIAN”을 들으며 소수 인종 여성이라는 테마를 조금 확장해 보면, 지금 한국에서 다른 아시아 국가의 정체성을 가진 여성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 여성들의 삶, 자아와 주관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도 사회가 소수 인종 여성의 삶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일 듯 하다.
한편, 림 킴이 “GENERASIAN”을 만들며 자신의 견해를 전파한 과정은 그가 한국 음악 시장의 일원이기에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미스틱 시절과 너무나도 다른 제작 과정으로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며, 둘 중 무엇이 림 킴의 ‘본의’에 가까웠는지는 명백해졌다. 그렇게 “GENERASIAN”은 과거 성인 남성의 시선에서 재단되던 어린 여성 뮤지션이 직접 활동의 주도권을 잡고 자기 주관을 설파하는 사람으로 성장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앨범이 되었다. 주로 어린 여성이 기획자 혹은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규정당하는 위치에 놓이곤 하는 한국 음악 시장에서, 그와 다른 방식을 제안하고 실현한 림 킴의 행보와 앨범의 메시지는 합쳐져 한 곳을 바라본다.
림 킴의 “GENERASIAN” 앨범은 서구권의 소수자 담론에 기초하여 한국에서 만들어졌다. 앨범 가사의 언어가 앨범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단편적이지 않기에, 서구권 담론을 기반으로, 영어 가사로 만들어진 앨범이 한국 음악계와 사회에서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영어 사용에 의미 부여하기
지금까지 오혁, 백예린, 림 킴을 통해 한국 시장에서 영어 곡을 발매하여 파급력을 만들어낸 사례를 살펴보았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어 곡을 계속 내놓는 자신의 행보에 의미를 부여하여 많은 지지자를 확보했다.
세 사람의 사례가 일반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한국 청중을 설득하고 싶다면 보통은 한국어 가사를 공들여 쓰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음악과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음악에서 가사의 언어가 특정 언어를 이용하여 특정 청중에게 다가가는 등 보통 쉽게 떠올리는 메커니즘으로만 동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너무 명백해 보인다. 오히려 때로는 지속적인 영어 사용에 특정 의미를 부여하여 감상의 폭을 넓힐 수도 있을 것 같다.
청자로서 다른 언어로 된 음악을 들으며 다른 풍경을 맛보고, 다른 고민을 할 수 있다면 영어 가사를 쓰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