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여름이 시작된 모양입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땀이 흐르네요. 올여름은 비가 많이 오고 무더울 거라는 예보가 많던데 벌써 겁이 납니다. 하지만, 여름에만 즐길 수 있는 청량한 것들을 챙기다 보면 어느덧 가을이 오는 모양이라고 말할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벌이자, 복은 기어코 시간은 흐른다는 것이니까...! 이상,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가열찬 다짐이었고요.
오늘의 주제는 시간이 이만큼 흐르기 전 그러니까 개인 정보를 얼마나 수집해 가냐, 언제까지 보관하냐를 문제 삼는 지금과 달리 만천하에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당연하던 그 시절 필수품! 전화번호부예요.
전화번호부 기억하시나요?
드라마 <응답하라 1988>를 보면 정봉이가 두꺼운 책을 보며 희귀한 이름을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정봉을 즐겁게 해주는 의문의 두꺼운 책이 바로 전화번호부예요. 이름을 찾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전화번호부에는 가게 번호만 적힌 게 아니랍니다. 이 지역 어딘가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부가 고스란히 적혀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엄청난 두께감을 자랑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당시엔 엄청난 두께의 무엇을 설명하고 싶을 때면 ‘전화번호부만 하다’라는 말로 주장에 힘을 싣기도 했습니다.
온갖 정보가 다 담겨있다 보니, 전화번호부를 보고 이웃집의 연락처를 찾기도 했고요. 정봉이처럼 훌륭한 킬링타임 아이템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저만 해도, 할머니 댁에 있던 전화번호부를 펴서 맘에 드는 이름에 형광펜을 칠하거나 나랑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곤 했으니까요. (이름 같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는 몇 년 뒤, 싸이월드 사람 검색으로 계보를 잇게 됩니다)
전화번호부는 누가 만들었을까?
전화번호부의 역사는 1966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를 시작한 곳은 한국통신의 자회사였던 ‘한국전화번호부’였다고 하는데요. 1년에 한 번씩 전화가입자의 지역번호에 맞춰 새로운 전화번호부를 발급해 주곤 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는 전화번호부는 얼마였을까요? 무료였습니다. 무슨 돈이 있어 이걸 다 무료 배포했을까 궁금했는데요. 광고 수수료가 있었기 때문에 끄떡없었대요. 한때는 1가정 1전화번호부는 물론이고 옥색의 공중전화부스에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풍경이 자연스러웠던 전화번호부였는데요. 휴대폰의 사용이 늘고 유선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는 점, 사생활 보호에 대한 이슈가 뜨겁다는 점 등으로 점점 역사의 뒤안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전화번호부, 지금도 있나요?
네, 있더라고요. 장난 전화, 사기 등 전화번호부를 악용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인명 연락처는 제공하지 않지만, 여전히 업장의 정보를 모아서 알려주고 있어요. 종이책 대신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고 개정판이 필요 없도록 업장주들이 정보를 수정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코바늘로 뜬 것 같은 레이스 전화받침대 위에 놓인 유선 전화기. (가끔 전화기를 감싸는 손잡이마저 예쁘게 꾸며놓은 친구 집에 놀러 갔던 기억이 있네요) 그 옆에 있던 두꺼운 전화번호부와 자그마한 노트. 노트 안에 그어진 얇은 유선에 갇히지 않고 자유분방한 크기로 적혀있던 엄마 친구 연락처, 할머니 연락처, 고모 연락처가 떠오릅니다. 사실 노트에 적힌 대부분의 연락처는 손가락이 기억하는 번호들이 대다수였으므로 적을 필요가 없는 번호도 많았어요. 15개 정도의 번호는 쉽게 외웠던 것 같아요. 친구네 집에 전화하기 전에는 꼭 한숨 한번 쉬고 가정통신문 뒷장에다가 친구 가족이 전화를 받을 경우 해야 하는 멘트를 적어두고 읊조린 다음에 숨도 안 쉬고 다다다다다 읽어줘야 제맛이었던 시절입니다. 우리 집엔 아직 유선전화기가 있는데요. 집 전화번호를 외우는 할머니 전용 연락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집 전화가 오면 할머니 전화다! 생각하고 받곤 합니다.
요즘은 드문데 예전엔 유선전화로 통화하던 엄마가 옆에 놓인 노트에 끄적이며 오래 대화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어요. 뭘 저렇게 적나 해서 보면 별 내용도 없고 그림과 단어들이었네요. 전화 곁에 머물던 온갖 숫자와 기호들이 떠오릅니다. 미지의 당신은 유선전화와 전화번호부에 얽힌 추억을 가지고 계시는가요? 무엇이든 나눠주시기를 바라며 오늘의 편지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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