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차 사사의 레터]
🧼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다시 백수 사사입니다.
오늘 눈을 뜨니 내 방입니다. 아무 일정도 없습니다. 집에 온 택배를 하나 뜯고 공과금을 냈습니다. 국을 끓이고 밥을 먹었습니다. 여행이 끝나니 이제서야 퇴사가 실감이 납니다.
마감이 있는 여행은 늘 긴장감이 맴돌았습니다. 근성백과 저는 5시 정도면 불안해졌어요. 가끔은 둘 다 말 없이 교토 거리를 걸었습니다. 머릿속으로 뭘 어떻게 쓸지 생각하면서요. 그럼에도 몇 번 9시를 넘겼네요. 사과드려요.
더이상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라고 저는 퇴사하면서 말했습니다. 글쓰기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적성은 무슨.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을지도요. 그냥 쓰는 겁니다. 근성백과 저는 어쨌든 썼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회사 분들께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근성백과 저 그리고 여러분만 아는 은밀한 프로젝트입니다. 그래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요상한 비유와 비약을 잔뜩 섞었어요. 감사드려요. 제 글을 읽어주셔서요.
이제 지원서를 쓸 차례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먼저 이 에필로그 먼저 써야겠죠. 어쨌든 쓰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안심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여행. 그래서 어제 저를 가장 빨리 맞이해 준건 우리 집 비누입니다. 바싹 마른 화장실 비누, 맨들거리지 않는 비누, 쓰다 보면 다시 맨드래지는 비누.
맨들 비누는 기분이 좋습니다. 손을 씻으며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퇴사를 고찰했다고 해도 크게 변하는 거 없을 겁니다. 다음 회사 생활이 드라마틱하게 행복해진다거나, 편해진다거나 하지 않을 겁니다. 방울 상사도, 전문가 J 씨도, 대표님도 어디에나 있을 겁니다. ‘쓸 수 없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또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다시 잠시 가는 겁니다. 그래서 비누를 바싹 말리는 겁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다시 쓰는 겁니다.
맨들맨들맨드라미 비누를요.
“어릴 때 내가 상상한 미래는 지구 멸망이나 대지진, 변이 바이러스의 유행이나 제3차세계대전 같은 끔찍한 것 아니면 우주여행과 자기부상열차, 인공지능 등의 낙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10년 차 근면성실백수의 레터]
⛩️ 내가 절연해야 할 이름은
교토 기온에는 야스이 신사가 있습니다. 도시 한가운데 있는 작은 신사에요. 저녁에 이곳을 찾았습니다. 여행 가기 전부터 사사가 여기에 가보고 싶다고 했어요. 이 신사의 별명은 ‘절연 신사’입니다. 좋지 않은 인연을 끊어주고, 좋은 인연을 맺어준다고 합니다. 지금 가기에 딱 좋지 않나요?
우리가 신사에 들어섰을 땐 해가 진 후였어요. 어두운 신사를 들어서는데 일본 공포 게임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어서 무서웠는데 재밌기도 했습니다.
신사 안쪽으로 들어서면 소원을 적는 종이가 있어요. 그 옆에는 그 종이가 잔뜩 붙은 돌이 있는데, 이 돌의 중앙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만한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네. 바로 그 구멍으로 들어가서 반대편으로 나오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네요.
나름 경건한 마음으로 소원 쓰는 종이 앞에 섰습니다. 나는 어떤 인연과 절연을 하고 싶었던가요. 싫어했던 회사 동료? 힘들게 했던 대표님? 아니면 다른 누구? 사실 저는 신사에 오기 전 한참 고민을 해왔어요. 저는 과거의 제 자신과 절연하고 싶습니다.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를 걱정하는, 불안과 힘듦이 가득했던 과거의 나를 이만 보내고 싶었어요. 과거의 나와 절연을 하겠다, 고 종이에 소원을 쓰고 종이를 접고 풀을 바르고 돌에 척 붙였습니다.
아쉽게도 저는 돌 구멍을 통과하지 않았어요. 치마를 입었거든요. 대신 사사가 열심히 돌을 통과하는 것을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아마 이날을 통틀어 가장 많이 웃은 장면일 거에요. (지금도 생각하니 웃기네요. 영상을 다시 찾아봐야겠어요.)
그렇게 과거의 나를 보내주고 나서, 지금은 마지막 레터를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지금을 살아가려고요. 그동안 레터를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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