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086] 기세 : 2023년의 한국 영화

2023.12.16 | 조회 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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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데이 원무비

이상한 영화평론가 김철홍이 보내는 영화 뉴스레터 @1day1m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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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시사회로 본 두 편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 한 편은 잭 스나이더 감독의 <Rebel Moon(레벨 문): 파트1 불의 아이>이고, 다른 한 편은 김한민 감독의 거대 프로젝트 이순신 장군 3부작의 마지막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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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문 파트1>을 보고 든 생각은, 잭 스나이더 당신 참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면서 즐겁게 살고 있구나, 였다. <레벨 문>은 잭 스나이더가 직접 창작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SF 영화로, 본인의 말에 따르면 무려 스타워즈의 스핀오프라고 생각하고 제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스타워즈처럼 우주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며, 당연히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종족들이 영화에 등장한다. 물론 주인공들은 역시 인간이다. 핵심 주인공은 소피아 부텔라 배우가 연기한 코라라는 인물이다. 코라는 과거에 잘나가던 ‘제국’의 전사였는데, 모종의 사건을 겪은 다음 지금은 한산한 농업 행성에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국이 이 행성에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는 바람에, 코라는 하는 수 없이 정체를 드러낸 뒤 마을을 지키기 위해 팀을 꾸리기 시작한다. 멤버는 재야의 은둔 고수거나 혹은 ‘반란군’의 주축 인사 등등이다. 은둔 고수 중 한 명으로 네메시스라는 여성 검객이 등장하는데, 이 역할을 바로 배두나가 연기한다.

여기까지만 설명해도 이미 떠오르는 영화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제국주의적인 국가의 존재와 이에 맞서는 반란군이 있다는 설정은 누가 뭐래도 스타워즈이고, 멤버들을 모아 힘없는 마을을 지킨다는 설정은 여지없이 <7인의 사무라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것들로부터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레퍼런스가 너무나도 ‘쉽게’ 생각난다는 것은 큰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그냥 감독이 하고 싶은 거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은 채 슥슥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매력적이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배두나 배우가 맡은 캐릭터도 멋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정말 마음속 깊이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솔직히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물론 과실로 따지면 배우보다 감독의 잘못이 훨씬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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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죽음의 바다> 역시 진지하게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 과실을 따져봐야 할 작품이었다. 한국 영화 역사상 이 정도의 대규모 프로젝트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경우는 감독-배우가 아닌, 감독-제작자 간의 싸움이다. <노량>을 보는 동안 든 생각은, 감독 정말 힘들겠구나, 였다. <명량>의 대박 흥행 이후 <한산>과 <노량>을 만들면서, 감독 김한민은 과연 행복했을까? 하나도 발전되지 않은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를 보며, 그동안 정말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 영화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이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인 이순신을 다룬 영화.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량>은, 이전 영화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영화였다. 다른 건 배우와 등장인물과 지명(이자 제목)뿐. 나는 이 영화에서 아무런 도전을 느끼지 못했다. 감독이 욕심을 부려 무얼 해보려다 발을 헛디딘 거라면 이 정도로는 아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 장면이라도 이전 영화와 다른 무언가를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가진 채 영화를 본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

오직 3부작이라는 기획을 완성시켜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영화 <노량>. 이건 진정 김한민 감독의 욕망이었을까? <명량>으로 대박의 맛을 본 제작자 혹은 산업의 욕망은 아니었을까. 머릿속에 영화로 어떻게든 뽕을 뽑으려는 누군가들의 눈물겨운 기세가 그려졌다. 그 결과물인 <노량>의 끝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군 세력을 뿌리뽑기 위해 기세를 올리려다 그만 적군의 총을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 장군과 이순신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기세를 동일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요즘 자꾸 기세에 대한 생각이 드는 것뿐이다. 위대한 일을 만들기도, 또 위대한 사람을 쓰러지게 만들기도 하는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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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칠듯한 기세로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서울의 봄>은 완전히 기세 그 자체인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이태신 장군이 전두광을 막아보기 위해 홀로 바리케이드를 넘는 장면이다.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 인물의 처지를 비유적으로 시각화한 장면인 이 씬에서, 정우성 배우는 계속해서 장애물을 넘다 쓰러진다. 그의 기세는 서울에 진짜 봄을 소환할 기세이지만, 영화적 관점에서 너무나 인위적으로 설치된 오브제들이 그를 지속적으로 저지한다. 위대한 일을 하려는 자의 기세와 그 자를 저지하려는 기세가 아이러니한 조화를 이룬다. 이태신은 이 기세의 구역에 향하기 직전, 자신의 부하들에게 마지막 부탁으로 절대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한다. 그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고 진짜로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몸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영원히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의 흥행이 또 어떤 기세들을 만들어낼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 희망을 이토록 쉬운 영화가 견인하고 있다는 점이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다. 자막으로 범벅된 한 영화 or <범죄도시>라니. 정말 맛이 없는 선택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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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2023년 한국 영화를 결산하는 뉘앙스의 글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내친김에, 아니 기세를 탄 김에 얘기하자면, 올해 한국 영화 중 나를 가장 흥분시킨 것은 <거미집>이었다. ‘흥분’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실제로 한 것이다. 그 순간엔 역시 정말 재밌게도, 동시에 정말 상징적이게도 정우성이 있다. 신상옥 감독을 모델로 한 감독 신상호 역할로 깜짝 등장하는 정우성은 영화를 말 그대로 뒤집어 놓는다. 실제뿐만 아니라 영화 속 세계에서도 이미 죽은 인물인 신감독은 세상을 떠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복잡한 상태(“이런 빌어먹을 현장. 지긋지긋한 인간들. — 망했어. 아무것도 못 해보고 영화 인생 끝났어. 끝났어.”)의 김감독의 눈앞에 등장해 뜨거운 조언을 건넨다. “이 사람아. 영화에 쉬웠던 적 어디 있었나?”

이 장면에 더해서 엔딩의 크레딧 순서까지 너무나 메타 영화 그 자체인 이 영화를 두고.. 개봉 당시 실제 김기영/신상호는 이러지 않았다거나, 김기영의 영화와 <거미집> 속 <거미집>의 차이를 지적하는 것에 할 말이 많았었다. 뭐 달랐다며 사실 적시를 하는 건 자유지만, 그걸 근거로 이 영화를 아쉽다고 말하는 건 핀트가 많이 어긋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더 심했다고 생각한 건,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영화 속 김감독의 영화가 원씬원컷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이었다. 김감독이 원씬원컷으로 찍겠다고 하고, 그렇게 찍는 현장까지 보여줬는데 결과물이 다른 것이 이 영화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걸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든 영화가 아닌데. 내게는 그걸 구태여, 티 나게, 의도적으로, 정말 누구도 알아차릴 수 있게, 서사적으론 아무런 쓸모가 없을지라도, 용기 내어 다르게 표현한 의도에 대해 추정하는 것이 영화의 재미다. 아니 재밌는 영화의, 좋은 영화의 조건이다. 그런 감독 자신의 믿음을, 목숨과 같은 영화 제작비를 소모하여 실현시키고 모조리 불태우고 있음을 말하는 영화, 그 웃픈 현장을 웃프게 시각화한 영화가 바로 <거미집>이다. 단연코 올해 한국 영화 중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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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다음 주부터 2주 동안 2023년 영화 결산 특집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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