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반 황윤은 어린 아들과 함께 군산의 한 갯벌을 찾는다. 황윤은 먼저 아들을 앞으로 보낸 뒤, 그 뒷모습과 함께 갯벌로 가는 길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런데 앞서가던 아들이 갑자기 뒤를 돌더니 카메라를 향해 소리친다. “안 오고 뭐해? 빨리 와!”
매년 11월 12월엔 영화를 몰아본다. 한 해를 돌아보며 좋았던 영화들을 연도별로 결산하고 순위를 매기는 일을 좋아해서다. 2023년의 베스트 영화 리스트를 정말로 제대로 뽑기 위해, 2023년에 개봉한 영화들을 되도록이면 빠짐없이 보려고 노력한다. 물론 사람이라면(?) 일 년 동안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볼 수 없는 것이 당연. 그걸 보완하기 위한 나의 방법은 일 년 내내 영화 레이다를 켜놓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를 보지 않는 시간에도 레이다를 통해 소위 말하는 ‘영화계’를 관찰한다. 어떤 영화들이 주목을 받았고, 어떤 배우들이 어떤 작품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 데이터를 수집해놓는 것이다.
그 결과물로 만들어진 ‘봐야 할 영화 리스트’를 살펴본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영화도 있고, 반대로 소수의 사람들만 그 존재를 알고 있는 희귀한 영화도 있다. 우선 손이 가는 건 당연히 희귀한 영화 쪽이다. 그런 영화들일수록 구미가 당기는 특정 요소를 보유하고 있는 편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 자체가 특이하거나, 아니면 영화의 형식이 마치 멸종 위기종처럼 개체 수 자체가 매우 적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주에 눈에 들어온 영화 역시 멸종 위기종 같은 영화였다.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다. 올해 6월에 개봉하여 약 5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한 영화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치고는 꽤 흥행한 것이라고 말하며 박수 쳐야 하나 애매하다. 물론 이 영화는 국내 여러 영화제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던 영화이기는 하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 상영된 적이 있고, 심지어 서울독립영화제에선 무려 관객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라>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져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영화의 존재 이유 자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수라’라는 곳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함이어서다. 그리고 수라는 지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수라’는 군산시의 새만금 간척 사업을 통해 메워진 갯벌 마을의 이름이다. 다시 말해 위기에 처한 이름이다. 수라가 사라지는 것이 단순히 마을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엄청난 사건인 이유는, 그 갯벌에 은하계의 별의 개수만큼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엔 밀물과 썰물을 터전 삼아 삶을 이어가는 해양 생명체들도 있고, 그 생명체들을 먹이 삼아 알을 낳는 철새들도 있다. 그중엔 높은 멸종 위기 등급을 갖고 있는 동물들도 많은데, 그 동물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수라는 세계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갯벌이었다. 그런 수라는 1987년, 최근 개봉한 <서울의 봄>으로 핫(?)한 전두환 정부가 ‘새만금 간첩 종합개발사업’을 공식 발표하면서부터 줄곧 지역 주민과의 갈등을 빚었었다. 이 갯벌을 땅으로 만들었을 때 생길 경제적 가치를 말하는 사람들과 이곳이 갯벌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했을 때의 가치를 말하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 수라를 뒤덮었다.
그중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은 갯벌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이곳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었다. 황윤 감독은 그들의 모습을 기록하다, 자신도 조사단처럼 갯벌을 기록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수라>는 그 변화의 과정을 말하는 영화다. 수라에 직접 와서 이 생태계의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한다면, 모두가 수라에 반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수라>는 다큐멘터리, 카메라 또는 영화의 존재 의미를 증명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수라가 사라지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멸종 위기종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걸 지켜낸 영화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멸종 위기에 처한 몇몇 영화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방법을 찾아낸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영화와 사람들을 보며, 또 한 번 희망을 느낀다.
영화 초반 황윤은 어린 아들과 함께 군산의 한 갯벌을 찾는다. 황윤은 먼저 아들을 앞으로 보낸 뒤, 그 뒷모습과 함께 갯벌로 가는 길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런데 앞서가던 아들이 갑자기 뒤를 돌더니 카메라를 향해 소리친다. “안 오고 뭐해? 빨리 와!” 카메라가 답한다. “가~!” 익숙한 모습이라 반가웠다. 나 또한 사람들과 여기저길 다닐 때 늘 카메라를 들고 뒤에 있는 편이다. 같이 걷다 이걸 찍고 싶어서 뒤에 남아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앞에 가던 사람은 왜 그런지 항상 그냥 가지 않고 뒤를 돌아 왜 안 오냐고 물었었다. ‘영상 망쳤네.’ 그럴 때마다 나는 매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었다. 멋진 영상이라면 그가 계속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걸어갔어야 하는 것인데, 뒤돌아 카메라에 말을 걸어버렸으니 멋진 영상으로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라>를 보고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나는 변했다. <수라>의 영화 후반부엔 훌쩍 커버린 아들의 모습이 다시 등장한다.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엄마를 향해 “빨리 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들도 변하고 황윤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다시 한번 그 변화의 과정이 이 영화에 있다. 이 변화만큼은 정말 진실이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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