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자자족

05. 일을 찾아 다니는 심심한 즐거움

뭐라도 해야 뭐라도 생기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2023.06.02 | 조회 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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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곰자자족'입니다. 다시 제게로 순서가 돌아왔네요. ‘일류여성’ 뉴스레터를 준비할 당시만 해도 프리랜서로 고정 월급을 받고 있던 저는 그 일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 일하며 배우고 깨달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생각이었습니다만 뜻하지 않게 그 일이 종료되고 말았습니다. 매달 5일이면 통장에 찍히는 반가운 숫자가 사라졌다는 것도 아쉬웠지만 그보다 뉴스레터의 소재를 잃게 된 게 더 아쉽고 안타까웠던 것 같아요. “앗, 이런. 이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하지?” 하고요. 그래서 쓰지 못했다는 자기 고백을 하는 거냐고요? 그럴 리가요. 마냥 한가로울 줄 알았던 지난 한 달 간, 저는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쁜 하루를 보냈답니다. 월말이 다가올 무렵에는 눈에 실핏줄까지 터졌고요. 새벽 퇴근이 일상이던 ‘프로 야근러’ 시절에도 생긴 적 없었는데 말이죠. 태어난 지 5개월 된 아기를 돌보는 틈틈이 일을 찾고 만들고, ‘그것’이 일이 되게 하는 법을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는 시간을 풀어볼까 합니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A4용지 크기의 화이트보드 달력이 붙어 있다. 각자의 중요 일정이나 가족 행사를 잊지 않고 기록해두기 위한 목적인데, 실제로는 거의 내 일정 위주로 적는 편이다. ‘00일 편집회의’, ‘00일 강원도 취재또는 ‘00일 밤 9시 줌 회의혹은 ‘00일 독서모임식으로. 단순해 보이는 메모에는 물론 이런 의미도 포함돼 있다. “짝꿍아, 00일 취재 가는 날에는 연차 써야 하는 거 잊지 마,”, “00일 줌 회의해야 하니 솔이 재우는 건 혼자 해야 해~” 같은, 짝꿍을 향한 일종의 메시지 알람 보드인 셈이다. 덕분에 한 달에 네다섯 번 정도는 엄마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5월에는 여백이 가득했다. ‘강원도 빈집 답사를 제외하고는 텅 빈 일정. 돈 버는 일이 없어졌다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아기를 낳고 나 자신으로 일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게 버겁다는 생각이 들던 때라 빈 시간이 내심 반가웠다. 돈 버는(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으니 내게도 휴식 같은 여백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고. 하지만 빈칸은 자연스레 솔이의 시간, 솔이를 위한 시간으로 채워졌다. 눕히면 뒤집고 다시 눕히면 또 뒤집는 아기의 성장 덕분에(?) 일이 배로 늘었기 때문이다. 뒤집기를 완벽 마스터한 아기는 배가 눌려 자주 토했다. 그리고 토 위에서 엎드린 채 양손을 휘젓고 놀았다. 옷을 갈아입히고 토가 잔뜩 묻은 매트를 닦고 쓰레기를 버리는 사이 다시 토하는 아기를 돌보는 시간은 전혀 비어 있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강원도 빈집 답사를 기다렸다. 150일 갓 지난 아기를 맡겨두고 떠난다는 게 불안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빈집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저 설렜다. 오히려 무엇이든 만들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 빈집이 바뀌어가는 과정을 현재진행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 그것을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로 함께 한다는 점이 두근거렸다. 회사를 다닐 때는 막연하고 정해지지 않은 것들에 불안함을 느꼈던 내가 이런 것에 재미를 느낀다는 자체가 생소하고 새로웠다. 이런 마음을 품을 수도 있구나.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된 데는 여럿이 영향을 줬다.

일단 주인이 두고 떠난 세간살이 비우는 청소 시작한다는 마을 이장님의 연락은 우리를 더 빨리, 분명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앉아서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일단 가보자고. 만약 이장님이 포클레인으로 필요 없는 창고를 허물고 짐을 비워낸다고 하지 않았다면 서둘러 일정을 잡을 수 있었을까?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인간이라면 그랬겠지만 냉정하게 자기객관화 해봤을 때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다. 아기가 있으니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면서 적당하다고 생각할 혹은 착각할 타이밍을 찾지 않았을까? 적극적으로 거들어주고 정리해주는 마을 이장님을 보면서 일이 진행되게 하려면 이런 추진력과 행동력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빈집은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계획에 없던 비용을 지출해야 하기에 실제 집을 계약한 동료, 프로젝트를 기획한 선배 동료에게 잘 설명해야 했다. 온라인에서 만나 의견을 나누었지만 당장 해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조금 더 고민해보자는 다소 열린 결말로 회의가 끝났다.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막막하게 질문만 던져보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아직 방도를 생각도 못했던 다음 날, 단체 채팅방에 선배 동료가 빈집의 용처를 바꾸어보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 아이디어에 금세 답을 찾은 것 같아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신이 나 활용할 방법들을 연이어 던졌다.

회사를 다니지 않고 어딘가 소속돼 있지 않은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이제 회사 다닐 때처럼 성장하거나 배우는 경험을 축적하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고정된 팀은 아니지만 팀처럼 함께 하는 현재의 동료들에게서 매순간 배운다. 아직은 수익이 날지 안 날지 모르는 일을 기획하는 법, 그리고 그 기획을 아이디어로만 놔두지 않고 실행할 수 있도록 디벨롭하는 법, 방법이 생각나지 않을 때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지면서 유연하게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동료나 선배로부터 배울 게 없을 거라는 내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면서.

아기가 잠든 밤 젖병을 닦고 이유식을 만들고 졸린 눈을 비비면서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회의하는 이 과정이 당장 내 월급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일을 찾고 일을 만들어 일하는 법, 좋은 동료를 찾고 좋은 동료가 되는 법을 가르쳐주리란 확신이 든다. 빈집이 채워지듯, 비어 있는 내 시간도 채워지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란 막연한 기대와 함께 다음주 회의도 기다려지는 마음이다. 생각지 못한 방향, 아이디어가 또 펼쳐지겠지. 그리고 스스로에게 용기내어 말을 건네본다. "뭐라도 해야 뭐라도 생기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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