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지금 믿고 맡길 사람 너밖에 없다.”
6월 초쯤 오래전 함께 일했던 상사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신규 프로젝트에 들어갈 건데, 인력이 부족하니 가급적 빠르게 출근하여 팀에 합류하길 바란다는 연락이었다. 혼자 비정기적으로 외주 일 받는 수동적(소극적) 형태 말고, 한 번만 더 동료들과 적극적으로 싸우면서(좋은 의미로)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 마냥 걸려온 전화였으니 더없이 반가웠다.
오후 1시 반부터 5시 반까지 4시간, 재택과 출근을 병행하는 근무 조건은 내게도 처음이었지만 상사 회사에서도 처음 해보는 방식이었다. 그만큼 내게는 여러 부담감과 책임감이 따랐다. 나를 위해 잘해야 하는 게 당연했지만 이런 형태의 자리를 만들고 나를 부르기 위해 애썼을 상사의 면을 위해서도 잘해야 했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었으나 계속 일을 찾고 있을 이름 모를 여자들을 위해서도 잘하고 싶었다. 그들에게도 나처럼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으니까. 내가 잘해야만 그들에게도 다음이 있었다.
여름의 기세가 나날이 강해지던 7월 초, 회사를 그만둔 지 3년하고도 4개월 만에 충무로에 있는 방송사 전략사업국에 출근했다.
70일간 내가 맡은 일은 경상북도에서 열리는 국제 AI 영상제의 초청과 섭외 업무였다. 초청과 섭외를 위해 필요한 문서와 콘텐츠를 만드는 일 또한 내 업무였다. 초청이요?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안심시키듯 상사는 말했다. “기자 간담회, 콘퍼런스 행사 많이 해봤잖아. 네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커뮤니케이션도 잘하고.” 나를 믿고 맡긴다는 건 고마운 일인데도 자꾸 걱정됐다. 이 일은 내가 지금까지 해본 일 안에 있기도 하고, 해보지 않은 일의 영역에 있기도 했다.
출근 첫날, 전략사업국원 모두 정신없어 보였다. 다음날 오전 10시가 제안서 제출 마감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RFP(request for proposal, 발주자가 과업 수행에 필요한 요구사항을 정리하여 제안서 작성에 도움을 주기 위한 제안요청서를 말한다)와 실시간 수정이 계속되는 제안서를 살펴봤다. 나는 나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세분화했다.
- VIP(장·차관, 국회의원, 국무회의 참석자 등)
- 기업 CEO
- 콘퍼런스 연사
- 심사위원(공모전, 어워즈)
- 마스터클래스 강연자
- 학회 세미나
- B2B 부스 참여 기업
- GV 진행자
- 셀럽(연예인, 배우, 가수 등)
이미 섭외된 사람도 있었지만, 접촉부터 해야 하는 대상도 있었다. 장차관이나 국회의원, 국무위원 등 VIP 섭외가 내게만 할당된 몫은 아닐 테지만 명단에 있는 이상 일단은 초청 담당인 내 일이었다. 내가 진짜로 이런 사람들을 섭외할 수 있을까? 내가 무슨 수로? (지금 생각하면 나 참 순진했네.)
퇴근길에 정치부 기자인 대학 후배에게 연락했다. 후배는 인터뷰도 많이 할 테고 정치인들을 많이 만날 테니 섭외 노하우를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행사 취지와 주관사(방송사) 설명을 한참 듣더니 후배는 아주 차분히 말했다. “언니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런 사람들은 언니가 연락한다고 만나주지 않죠. 결국 다 위에서 하는 거예요. 그들의 관계로. 그리고 섭외는 결국 돈이에요. 얼마 주는지에 따라 움직이죠. 언니는 그냥 제때 필요한 자료를 메일로 잘 넣어주는 걸로 역할을 다 하는 거예요.”
후배의 말은 내가 듣고 싶었던 말, 기대했던 말과는 전혀 달랐다. “아는데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 하는 일이니까......” 라고 말끝을 흐리면서 전화를 끊었다. 맞는 말인 걸 알면서도 어찌나 찜찜하고 불쾌하던지. 번지수 잘못 찾은 내 잘못이라고 마음을 쓸어내리며 흘러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때 후배 말에 발끈했던 나는 행사 디데이가 다가올수록 알게 된다. 후배의 말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확하게 맞는 말이었음을.)
어떤 날에는 초청 DB를 만들어 정보 업데이트를 했고, 또 어떤 날에는 초청 대상에 맞춰 초청장 문구와 설득 메시지를 작성했다. 초청하려면 행사 소개서가 필요할 테니 갖고 있는 제안서 자료들을 훑어보며 리플렛 혹은 프레스킷 초안을 만들었다. 결국 그들을 행사장으로 오게 만드는 건 ‘돈’일지라도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직은 행사 준비 시작단계였으니까.
출근 첫 주, 급하게 장소 대관을 위한 협찬 제안서를 써야 했다. ‘프레스킷 초안이라도 만들어두길 잘했네.’ 스스로 뿌듯해하며 PPT를 만졌다. 텅 빈 페이지를 채워 나갈수록 퇴근 시간은 점점 가까워졌다. 계약한 근무시간 이상으로 일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리라 예상 못한 건 아니었지만,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어린이집 연장반까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진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연장반에 적응할 때까지 만이라도 5시 30분 퇴근 시간을 꼭 지키고 싶었다.
그렇지만 짝꿍(아이 아빠)에게 아이 하원을 맡기고 나는 회사에 남았다. 상사의 수정사항에 따라 제안서를 고쳤다. 기업 회장(혹은 임원)이 보기 편하도록 글자는 크게 내용은 더 간결하게. 카톡에서 보낼 수 있게 이미지로 한 번에 보내달라는 요청까지 반영한 파일을 상사에게 던지고 늦은 퇴근을 서둘렀다. 이미 6시 30분. 아이가 하원했다는 키즈노트 알림이 울렸다.(이날부터 내가 프로젝트를 끝마칠 때까지 아이 하원은 온전히 짝꿍 몫이 된다.)
다른 기업에 보낼 협찬 제안서도 만들었다. 디자인을 싹 갈아엎자는 상사의 피드백 때문에 외부용 문서 파일은 수정1을 시작으로 수정17까지 가게 된다.(휴우) 그러던 중에 B2B 홍보부스에 들어올 기업 명단을 광복절 전까지 확정해달라는 주문 아니 요청을 받았다. 초청 목표는 30곳. 무려 30곳이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B2B 참여기업 설득용 협찬제안서도 만들어야 했다. 서울과 경기 소재의 기업이 인근도 아닌 경상북도까지 내려와 부스를 꾸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 어떤 혜택을 제공한다면 기업이 움직일까를 정말 잠꼬대할 정도로 고민했다.
혜택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부스에 초청할 기업을 서치하면서 목록을 만들었다. 협찬제안서의 혜택을 다시 수정하고 상사에게 컨펌 받는 동시에 제공하려는 혜택에 이슈는 없을지, 예산 범위 안에서 수용 가능한 부분인지를 다른 팀과도 논의해야 했다. 동시다발적이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원래 일이 다 그런 것 아니냐 물을 수도 있겠다.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4시간 프리랜서였다. 반나절 근무자에게 이 정도 업무량과 업무속도, 업무강도가 정말 적당한 것일까?
출근하자마자 한시도 쉬지 않고 일했지만 5시 반 퇴근은 어림도 없었다. 퇴근 시간은 되도록 지키라는 말을 짝꿍에게도 듣고 친한 선배들에게도 들었지만 어느 순간 오버타임 근무는 디폴트 값이 됐다. 4시간만 일한다는 건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회의도 참여하지 않고 페이퍼워크에만 집중하는 순수한 시간만을 말한 것은 아니었을지. 계약하는 순간에는 미처 몰랐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은 더 있었다. 업무 관련 연락이 수시로 온다는 점이었다. 퇴근하고는 물론이고, 내게는 공식적 업무시간이 아닌 아침에도 끊임없이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아침 7시 반부터 울리는 카톡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오전에 걸려오는 전화도 의식적으로 오후에 회신하고자 했다. 그러나 행사 d-50 시점을 지나면서 내가 지키고자 했던 경계는 무너졌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오전 시간에는 노트북만 켜지 않았을 뿐 커뮤니케이션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재택과 같았다.
예상 밖의 불만과 불합리를 어느 정도 감수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 노력을 해야 다음이 있지 않겠냐며 나를 다독이기도 했다. 무리한 만큼 내 포트폴리오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초청과 섭외 업무 외에 심사 업무까지 투입되며 금요일 밤부터 주말 내내 우는 아이 옆에서 노트북을 하다가 깨달았다. ‘이렇게 계속 해야 한다면 사람이 더 붙어야 할 것 같다’는 것을.
그렇게 내 밑으로 4년차 대리가 뽑혔다. 그때 인력 충원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이 프로젝트를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 확신한다. 육아, 일, 가사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점차 일에 모든 것이 잡아 먹혀가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평화가 찾아왔냐고 묻는다면 행사가 끝나는 날까지 그런 순간은 오지 않았다. 4시간 업무로는 애초에 할 수 없는 일의 특이성이 있었다. 행사 디데이가 가까워올수록 확인하고 확정해야 하는 부분은 많아졌는데 항상 딜레이되는 게 생겼으니까.
보고용 파일을 만들고, 다시 업무용 파일을 정리하고 섭외 진행 사항을 공유하는 지난한 과정 끝에 개막식 전날이 되었다. 전날까지도 확정 안 된 부분은 물론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해결해야 했고, 안되면 욕먹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 8시 조찬모임을 시작으로 밤 10시 애프터파티가 끝날 때까지 개막식 행사는 숨가쁘게 흘러갔다. 운영 상 미비점이 있었지만 큰 문제 없이 끝났다. 다음날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하루종일 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낮이 되자 그치는 듯 싶더니 본 행사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또 다시 비가 왔다. 레드카펫 장소를 바꾸고, 변경 사항을 안내하는 3시간 동안 100통이 넘는 전화를 주고 받았다. 그 안에는 문의도 있었고, 컴플레인도 있었다.
그렇게 나의 한시적 조직생활은 행사 종료와 함께 끝났다. 프리랜서가 되어 회사를 다닌 첫 경험, 첫 실험에는 득과 실이 분명하다. 득이라면 회사를 더 다녀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앞으로는 1인 사업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일을 찾고 만들어보겠다는 마음이 좀 더 크고 분명해졌다는 것일 테다. 실이라면 여유와 체력과 다정함을 잃었다.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거의 집에서 풀었다. 회사에서는 최대 총량의 다정함을 끌어내두고는 가장 가까운 사람인 짝꿍에게는 제일 예민하게 굴었던 점이 분명한 실이 아닐까 싶다.
그 외에는 득실을 따지기 어렵지만 다음에도 프리랜서로 어느 회사와 단기 계약을 맺게 된다면 고려해야 할 점들을 이번 실험을 통해 얻었다고 볼 수 있겠다. 가령 4시간 근무 시 지방 회의 및 출장으로 인한 오버타임 근무는 어떻게 조정되는지, 4시간 이상 근무가 일정 기간 계속 될 경우 대체 방안은 있는지, 4시간 근무 조건 외의 시간에 오는 업무 연락에 대한 응대는 어떻게 할 것인지, 택시 등 교통비는 별도 청구하는지, 급여 입금일은 언제인지 등이다. 70일간 직장생활 실험을 하는 중에도 여전히 미확인이었던 부분들. 다음에도 어디선가 한시적 조직생활을 하게 된다면 이런 것들은 시작 전에 미리 챙겨두고 임하고 싶다. 그리고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해보이고 싶다. 가능하다면.

※ 지난주 부유하는 유부처럼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차마 다 말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는 점 양해 말씀을 드립니다. 언젠가 우리가 직접 마주한 자리에서 아주 솔직하게 지난 70일간의 경험을 회고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하나도 남김없이 제가 경험하고, 제게 남은 것들을 공유하겠습니다.
📢[캠페인] 선배 시간 괜찮아요?
- 경험을 나눠줄 선배님의 인터뷰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마치 퇴사를 결심한 후배가 꺼내는 클리셰 같은 문장. 후배를 둔 직장인이라면 뜨끔할 이 문장을 구독자 여러분께 던집니다. 어느덧 사회생활 10년이 훌쩍 넘은 경력자들이지만 여전히 머릿속에 물음표를 달고 때론 답답한 마음에 풀리지 않는 분노를 삭혀가며 고군분투 중인데요, 이런 저희에게 본인의 경험담과 생각을 들려주실 귀한 선배님을 찾습니다.
조직생활과 독립에 대한 진솔한 조언부터 육아와 업무를 병행하는 워킹맘의 실전 팁, 커리어 전환의 경험까지 저희에게 들려주실 수 있는 분을 찾습니다. 딱 30분! 커피 한잔의 인터뷰 시간을 허락해주신다면 맛있는 커피 한잔 대접하면서 귀한 이야기들을 잘 담고 싶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인터뷰한다면 좋겠지만, zoom, 구글미트를 활용한 온라인 미팅, 서면으로 답변해주시는 것도 모두모두 환영입니다! 선배님의 소중한 경험담을 공유할 모든 통로를 활짝 열어놓을 테니 부담 없이 연락주세요! 함께 나눈 이야기는 세 에디터가 잘 갈무리해서 레터를 통해 구독자님들께 생생히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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