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 영화라면 지금 어떤 장면을 지나고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말 더듬이 너무 심했던 시기가 있었다. 일상적인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지장이 컸다. 회의에서는 물론 동료와 점심을 먹으러 갈 때도 대화가 힘들었다. 삼십대 초반을 지날 때였다. 커리어가 가장 가파르게 성장할 시기, 말 더듬에 발목이 붙잡힌 나는 앞으로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는 회의가 잦았다. 동료들은 회의를 할 때마다 조금씩 자신을 증명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매 미팅마다 긴장과 억울함을 느꼈다. 긴장은 ‘이번에는 한 번이라도 내 의견을 말할 수 있을까’에서 나오는 감정이었다. 억울함은 ‘오늘도 말하지 못했구나’라는 허탈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끝내 언어화되지 못하고 묻힌 생각은 그저 썩어갔다. 마음 속에 떠오른 어떤 의견도 주장도 완성되지 못한 채 조금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그 사라짐만큼 나는 주관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동료나 상사와 1대1로 대화하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 자리에 가면 안심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주한 자리에서 나는 말 더듬에 대한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요즘 말 더듬이 너무 심해져서 고민이다… 이 자체로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을까봐 걱정이다… 말 더듬이 시작되면 하려던 말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얘기를 하면 열이면 열 내게 답했다. 두현님 잘 하고 있다고. 말 더듬 때문에 두현님을 안 좋게 생각해본 적 없다고. 괜찮으니 천천히 얘기하라고.
그런 말을 들으면 한동안 안심했다. 그러다 또다른 회의에서 말을 심하게 더듬어버리면 나는 다시 불안해했다. 그러고나면 또다시 1대1 대화 시간을 찾았다. 들쑥날쑥한 파도 위에 떠 있는 작은 배처럼, 내 감정도 힘없이 오르락 내리락 반복했다.
한번은 대표님과 1대1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를 한 잔 했다. 대표님은 물었다. 요즘 가장 어려운 게 뭐냐고. 백 명이 넘는 회사의 수장으로서 마땅히 물어야할 진부한 질문이었다. 나는 다시 말 더듬 이야기를 꺼냈다. “ㅇ…요..요즘 마마말더듬이 심해져서 고..고고고고고민이에요.”
힘겹게 얘기를 꺼내는 내 마음 속에는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수도 없이 말 더듬에 대한 고민을 꺼내고 그에 대한 위로를 들어온 차였다. 이번에도 비슷한 말을 들을 게 뻔했다. 그러면 나는 얼마간의 안심을 얻고 다시 힘을 낼 거였다. 아마 대표님의 말이니 조금은 더 큰 안심을 안고.
대표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 밖이었다. “제가 가끔 CEO들 모임에 가는데, 저만 좋은 차가 아니거든요.” 나는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대표님을 바라봤다. “자리 끝나고 집에 갈때 주차장에서 서로의 차가 뭔지 알 수 있거든요. 제 차만 눈에 띄게 낡아 있어요. 근데 그게 절 좀 멋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나는 잠자코 들었다. “두현님이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말 더듬이 두현님을 훨씬 더 멋있게 보이게 만들어줄 수도 있어요.”
티가 나지는 않았겠지만, 아마 기분이 눈에 보이는 무엇이었다면 내 뒤로 꽃가루가 터지고 환한 햇살이 오직 나를 향해 내리비췄을 것이다. 순간 처음으로 내 말 더듬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늘 내게 붙어있었고 그만큼 버거웠고 밉기만 했던 말 더듬이 말이다. 대표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단지 위로하기 위한 얘기가 아니었다. 나도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 심지어 그 역할의 핵심을 말 더듬이 해줄 수 있다는 - 일견 믿기 힘든 얘기였지만, 충분히 말이 되는 가설이었다.
나는 대표님의 말을 빠르게 이해했다. 말 더듬이 날 멋있게 보이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말에는, 이야기의 법칙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든 소설에서든 주인공의 이야기를 더 돋보이게 해주는 건 그를 가로막던 장애물이다. 그에게 닥쳤던 시련이다. 모든 주인공은 자신에게 붙어있는 어려움과 씨름한다.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순간 나는 말 더듬을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내 인생이라는 스토리를 더 극적으로 만들어 줄 장치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피하거나 숨기거나 양해를 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게 이런 어려움이 있지만 나는 그럼에도 해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장치.
술에 반쯤 취한 채 집에 돌아오는 길, 밤공기를 맞으며 테헤란로를 걸었다. 내 인생이 영화라면 지금 어떤 장면을 지나고 있을까. 아마 초중반, 주인공이 어려움과 마주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일 거다. 클라이맥스에 관객들에게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힘들어하는 주인공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있는 그런.
제가 책을 냅니다. 산문집이고요. 말 더듬에 대한 이야기, 컴플렉스에서 회복하는 이야기, 겉으로 보여지는 어떤 특징 때문에 너무 쉽게 규정되어지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예약 판매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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