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다니던 국어 학원은 선생님으로 유명했다. 그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존대했고 ‘하오체’를 썼다. “민지 학생은 그렇게 생각하오?”, “그래서 13번의 답은 4번이 되는 것이오.” 정말 이런 식으로 말했다.
때론 수업 중에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언어영역(국어영역의 예전 이름)의 어떤 지문은 글만 보는 것보다 노래로 화자의 심정을 익히는 게 낫다고 했다. 마주하는 글의 깊이를 학생들이 헤아릴 수 있도록 선생님은 몸을 아끼지 않았다.
한 번은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가 학원에 새로 왔다. 내가 알기로 그 애는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는 애였다. 선생님은 그 아이와 몇 마디 나눠보더니 “정말 훌륭한 학생이오. 아마 전교 1, 2등을 다툴 것 같소.”라고 했다. 나는 여자애가 한 말에 별로 특별한 게 없어 보였기 때문에 놀랐다. 선생님은 겉으로 보이는 비범함만큼 인간의 깊이를 단숨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나는 뛰어나지 않은 학생이었고 선생님의 말을 반도 이해 못하는 적이 많았다. 그치만 그 선생님에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다는 것, 그의 가르침을 잘 따라간다면 단순 시험 점수보다 깊이있는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집에 “선생님이 잘 가르쳐”라고 말했고 계속해서 그 학원을 다녔다.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볼일이 있어 학원에 들렀다가 선생님과 짧은 대화를 나눈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네게 여성스러운 면이 있다고 하더라.” 좀 황당했다. 여성스럽다니? 나는 또래에 비해 덩치가 컸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애였다. 남성에게 여성스럽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어찌저찌 대학생이 됐다. 성인이 되고 나선 조직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 애들 사이 이너 서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노력이 필요했다. 적재적소에 웃긴 농담을 던질 줄 알아야 했고 내게 날아오는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했다. 게임도 곧잘 해야 했고 짖궃은 농담도 할 줄 알아야 했다. 술을 잘 마셔야 했고 음담패설에 웃을 줄도 알아야 했다. 나는 남자 애들과 어울리면서도 겉도는 기분을 매번 느꼈다. 수위 높은 농담을 불편해하는 내겐 ‘씹선비’라는 별명이 붙었다. 씹선비라고 불릴 때마다 웃어넘겼지만 나는 좀 혼란스러웠다. 고상한 척 한 게 아니라 정말로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런 걸 불편해하는 남자애는 정말이지 나 뿐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현이에겐 여성스러운 면모가 있어요.” 국어 선생님의 말이 성인이 돼서도 종종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좀 이상한 사람일지 모른다. 세상 이치에 반하는 면모를 타고난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영원히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남성이고 너무 남성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속에는 그렇지 않은 모습이 있기 때문에.
나는 씹선비라고 불릴 때마다 약간씩 다쳤지만 결코 씹선비로서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단한 의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꺾는 게 불가능했을 뿐이다. 영혼이 불편하다고 하는 장난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건 그냥 할 수가 없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내 인간관계에는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가깝게 지냈던 남자 애들과 연락이 뜸해졌다.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그때도 나는 생각했다. 내 여성스러움이 이 어긋남을 만든 걸까, 하고.
아내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그 시간 동안 내 일상을 채웠던 것들은 내겐 좀 새로운 일들이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깊은 영화를 보거나 심지어 뜨개질을 하거나 했다.
얼마 전 아내의 직장 동료 커플네 집에 놀러갔다. 그들의 취향으로 꾸며진 혜화동의 집이 예뻤다. 곳곳에 영화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집이 책으로 가득했다. 영화나 책들로 채워진 공간에 가면 늘 기분이 좋았다. 직접 한 요리를 대접받고 약간의 술을 곁들이며 살짝 취하기도 했다. 그들의 공간에는 코타츠가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난 뒤 코타츠 주변에 모여앉아 과일을 먹기로 했다.
아내의 동료의 남자친구가 말했다. “우리 1분 글짓기 게임 할까요?”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한 명이 3가지 키워드를 임의로 말하면 나머지 세 명이 그 키워드를 가지고 1분 동안 짧은 글짓기를 하는 거였다. 그리고는 돌아가며 자기가 쓴 글을 읽는 게임이었다.
너무 낯선 게임이라, 어느 누구를 만나도 그런 건 해본 적이 없어서 머뭇거렸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난데없이 글을 쓰는 것도 웃긴데 낭독까지 해야 한다니 민망했다. 머뭇거리는 내게 남자는 말했다. “형, 이거 진짜 형이 좋아할 거예요. 그리고 형이 쓴 글이 진짜 궁금해요.”
못 이기는 척 나는 게임에 꼈다.
누구보다 그 게임을 즐기는 나를 보고 아내의 직장 동료는 “두현님 더 하고 싶죠?”라고 놀리듯 말했다. 그 날 이유모를 행복감에 젖어 집에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여성스럽다고 말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부터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과 사람에게 솔직한 모습으로 다가가겠다고.
아래는 그때 1분 글짓기 게임에서 내가 쓴 글들이다. 부록으로 남긴다.
제시어: 다람쥐 블루투스 요가매트
요가매트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을 하겠다고 앉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쳤다. 어이없는 것, 예를들면 어제 산책에 봤던 도토리 까먹는 다람쥐라던가. 역시 난 글렀어, 라고 생각했다. 그때 블루투스가 해제됐다. 휴대폰이 울린 것이다. 그녀였다.
제시어: 달 안경 그런데
안경을 고쳐썼다. 그런데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낀 건지 미세먼지가 심한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지경이면 밤에도 달이 잘 안 보일 거다. 걱정됐다. 달이 보이지 않으면 그가 늑대인간으로 변할 수 없을 터였다. 아니, 달이 보이고 안 보이는건 중요하지 않은 건가?
막상 눈사람 계단
막상 집을 나오니 막막했다.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너무 큰 소리를 치고 나왔다. 아파트 계단에 가만히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봤다. 날씨가 흐려 곧 눈이 올 것 같았다. 눈사람이 생각났다. 아빠랑 같이 만든 그 눈사람. 그때는 사이가 좋았는데 왜 이 지경이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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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독사
나도 젊었을 때 친구들이랑 농담은 잘 하고 놀았는데 남자들끼리 흔히 하는 욕을 섞어서 하는 농담은 못 하겠더라고 이거 재밌는 게임이겠다 나도 와이프랑한번 해 봐야 되겠다 근데 제시어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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