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내 일기는 예외없이 ‘좋은 하루였다’라는 문장으로 끝났다.
“오늘은 축구를 했다. 한 골을 넣었다. 집에 와서 엄마가 해준 맛있는 밥을 먹었다. 좋은 하루였다.”
마지막엔 늘 느낀점을 적었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려면 욕심을 버려야 겠다.”
느낀점은 그 날 느낀 교훈이었고 “좋은 하루였다”는 그 하루에 대한 소감이었다. 일기 쓰는 게 귀찮았는지 나의 결론은 매일 비슷비슷했다. [교훈 + 소감 콤보]는 일기를 빠르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조합이었다. 그 날의 일을 나열한 뒤 포맷대로 말을 붙이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렇게 하루하루를 결론지었다.
커가면서 일기 쓰는 건 그만두었다. 대신 다른 종류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로 이야기들이었다. 길거리 인터뷰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나 내가 사는 일상의 이야기. 글 다운 글을 써야 했기에 더이상 “좋은 하루였다”는 문장으로 글을 끝맺진 않았다. 하지만 성인이 된 내 글의 마무리는 초등학생 일기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느낀점이라는 파트가 따로 있진 않았으나 꼭 새롭게 얻은 교훈으로 결론을 지었다. 당연하다는 듯 그 교훈을 얻은 소감이 따라붙었고.
교훈과 소감이 아니고서 이야기를 끝맺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 어떤 이야기도 두 가지를 남기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쓰는 글은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거나 인사이트를 주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이야기'라는 그 자체인데 교훈이 없다면 읽을 이유가 있겠는가. 교훈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가.
나이가 들고 써야 하는 글이 많아질 수록 마무리를 짓는 일이 어려워졌다. 재미있는 주제가 생각나 술술 적다가도 글을 끝맺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막막해졌다. 도무지 교훈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얼마 전 친구 J를 만났는데 마음에 남은 게 많아 그와 함께한 시간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런데 J와의 대화에서 깨달은 것이라거나 교훈이라거나 소감이라거나… 무엇이 됐든 결론이랄 건 딱히 없었다.
J는 최근에 가지게 된 생각에 대해 말했다. 하던 일에서 벗어나 사업을 하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J의 이야기가 재밌었다. 더 큰 꿈을 세운 J가 멋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눈 시간이 근래 손에 꼽을만큼 좋았다. 근데 그게 다였다. 일하는 분야가 달랐기 때문인지 깨달음이나 교훈은 전혀 없었다.
다만 그 만남이 마음에 남은 건 이런 거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인 J와 삽십대 중반이 들어 만나니 대화의 주제가 새롭네.’, ‘날씨 좋은 초가을에 친구를 만나니 기분이 좋다’, ‘종종 이런 시간을 가져야 겠어’
이 정도의 소감만을 남긴 J와의 만남을 어떻게 써야할까. 그니까 이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결론지어야 할까. “좋은 하루였다”라는 필살의 마무리 문장도 쓸 수 없고 ‘느낀 점’도 애매한데 말이다. 내가 삽십대 중반 한복판에서 오랜 친구와 ’종종 이런 시간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게 읽는 사람에게 대체 어떤 의미를 준단 말인가.
글을 마무리 짓는 건 점점 어려워졌다. 명확한 결론이란 게 사실은 없는 경우를 만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최근에 친구 C와 H가 크게 싸웠다는 얘기를 들었다. 처음 C에게 얘기를 들었을 때 H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충격일 정도로 의외였다. 둘 다 소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둘의 이야기를 깊게 들었다. H의 행동에도 이유가 있었다. C가 그 이유를 보지 못 한 것도 이해가 됐다. C가 오해할 걸 알면서도 H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점도 보였다. 그래서 누구의 잘못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 일은 전혀 결론지어지지 않은 상태로 내 마음 속에 남아있다.
계절이 지날수록 세상의 많은 일이 결론은 사실 없는 경우가 많다고 느낀다. 한 쪽의 잘못이 분명해 보이던 갈등도 깊게 알게 될 수록 그 경계가 애매해진다. 단정지었던 타인의 성격도 친해질수록 새로운 면에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누구도, 어떤 일도 단면적이기만 한 세상일은 없다는 걸 갈수록 실감한다.
글을 쓸 때 나는 세상일을 쓰는 사람이기에 혼란스럽다. 결론이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세상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결론 따위는 없다는 걸 깊게 깨닫기 때문에 혼란은 커지기만 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러므로 쓰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정경을 있는 힘껏 정직하게 쓸 뿐일지도 모른다.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아주 희미하게, 삶의 정경을 그대로 바라보는 시각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아마도 그런 시각 자체가 갖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읽는 입장에서도 새롭기 때문에. 새로움은 새로운 생각을 낳을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지원과 카페에 와 있다. 결혼 1주년이 내일이라 기념 사진을 찍고 인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시끌시끌한 카페에 감미로운 음악이 흐른다. 날씨는 결혼하던 그 날처럼 쌀쌀하고 지원은 버진로드를 걷던 그 순간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있다. 최대치로 차려입은 우리 둘은 꽤나 어울린다. 결혼 10주년이 되고 50주년이 돼도 비슷한 모습이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다할 교훈도 결론도 없는 하루가, 하지만 오랫동안 기억할 하루가 오늘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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