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깊어지고 풀이 무성히 자라나기 시작하면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다들 말끔히 정리된 보도블럭 옆 풀밭만 보지만 그건 모두 이름모를 누군가가 힘들여 제초를 한 것이다. 우린 종종 그의 존재를 되새기고 고마워할 필요가 있다. 길을 걷다 깨끗한 풀밭을 본다면 잠시 눈을 감고 그려보자. 그 거리를 산뜻하게 걸을 우릴 위해 풀을 깎는 작업자들을…
뜬금없는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군 복무 시절 땀흘려 제초하던 기억 때문이다. 나는 여름이 시작될 즈음 자대에 배치됐고 제초 작업이 필요한 때에는 부대에서 막내였다. 자연스럽게 손에 밀짚모자와 작업복, 제초기가 쥐어졌다. 아침이면 제초기를 메고 그 날의 작업 현장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15분씩 쉬는 시간이 나면 아무데나 앉아 물을 마셨다. 하루종일 풀을 깎아도 멀리서 보면 내가 작업한 범위는 허무할 정도로 작았다. 완전히 지쳐 생활관에 돌아오면 온 몸에서 풀냄새랑 제초기의 석유 냄새가 났다. 나는 군 시절의 반을 그 냄새로 기억한다.
어떤 조직에 가든 내겐 인정 욕구가 있었다. 그건 나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면 간부와 선임들이 날 일 잘하는 신병으로 알아줄거란 생각이 있었다. 군대에서의 하루하루가 나아질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래서 제초도 열심히 했다. 땀으로 군복이 젖고 아토피가 도져도 개의치 않고 제초기를 돌렸다. 일과가 끝나면 쓰러져 잤고 잠에서 깨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다시 제초를 하러 나섰다.
제초 작업을 할 때는 현장을 감독하는 간부가 배치된다. 하루는 새로 전입 온 계급 높은 간부가 함께했다. 병사들에게 미칠 영향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 들고 싶었다.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마음으로 제초기를 들고 작업 지역으로 갔다.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자세를 잡고 제초기의 시동을 걸기 위해 시동줄을 힘껏 당겼다. 원래 시동줄을 담기면 묵직함과 함께 모터가 돌아가야 했는데 그냥 훅 빠지는 느낌이 났다. 놀랄 새도 없이 나는 뒤로 넘어졌다. 손에는 힘없는 줄이 매달린 채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너무 세게 당긴 바람에 시동줄이 빠진 것이다.
군대에서는 작은 일도 큰 일처럼 느껴진다. 아니 작아 보이는 일도 큰 일이다. 대대에 3대 밖에 없었던 제초기 중 하나를 내가 고장냈다. 그것도 가장 활발하게 제초를 해야 하는 시기에... 군부대에서의 제초는 일반인의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군의 경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언제 높은 사람이 올지 모르는데 풀밭을 엉망으로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서마다 예산은 정해져 있는데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를 일개 신병이 망가뜨려 버렸으니 질책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정비 대대에 가서 수리를 부탁했는데 선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 했다.
제대하고도 그런 일은 많았다. 과도하게 들어간 힘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 일수였다. 중요한 발표 자리에선 필요 이상으로 긴장해 버벅였고 축구 결승전에선 발에 힘이 잔뜩 들어가 공을 골대 너머로 날려버렸다. 인터뷰를 할 때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큰 나머지 말을 너무 심하게 더듬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겐 힘을 좀 빼라는 조언이 들어왔다. 수영이나 요가를 배우러 가서도 새로운 자세를 배울 때면 같은 말을 들었다. 처음엔 그 얘길 이해하지 못했다. 힘을 빼야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니 이상했다.
커가면서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희미하게 알아가기 시작했다. 힘을 빼야 한다는 건 단순히 힘을 빼란 말이 아니었다. 핵심을 파악하고 쓸데없는 일에 힘을 쓰지 말라는 의미였다. 수영을 한다면 수영을 하는데 진짜 필요한 코어와 자세를 유지하는 데 집중해 힘을 효율적으로 쓰라는 거였다. 제초기 시동을 건다면 시동을 거는데 필요한 적절한 힘만 딱 주라는 말이었다.
머리로는 알지만 나는 여전히도 힘을 빼는 게 어렵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힘을 써야 하는지 찾는 게 쉽지 않다. ‘감을 잡았다'라는 기분에 들떴던 순간도 있다. 하지만 조금 지나고 난 뒤에는 내가 어떻게 잘할 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는 생각 밖엔 들지 않아서 다음 번에도 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게도 많은 책임이 생겼다. 내가 가장인 가정이 생겼다. 회사에서는 팀을 리드해야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군대에서의 제초 작업과는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한 순간들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내 손에 힘없이 대롱대롱 걸려있던 제초기의 시동줄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분명 잘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잘하려다 일을 그르치는 게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맞서되, 그걸 힘으로만 이겨내려 하면 안 된다는 오묘한 진리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조금 슬픈 건 마음이 진심일수록, 잘하고 싶을수록 힘은 필요 이상으로 들어가기 쉽다는 점이다. 진심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환상은 깨진지 오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나는 아직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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