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더듬이 찾아온 건 10살 즈음부터였다. 심리적인 것들이 보통 그렇듯 명확한 이유를 알진 못했다. 그래선지 오래도 말 더듬을 안고 살았다. 많은 어른들은 내가 어른이 되면 저절로 고쳐질 거라고 했지만 아니었다. 20대가 다 지나도 30대 중반이 돼도 나는 말을 더듬었다.
언어치료 센터도 다녀봤고 상담도 받아봤지만 말 더듬은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말 더듬을 안은 채로 학교든 군대든 직장 생활이든 꾸역꾸역 해왔다. 당연히 말 더듬은 방해가 됐다. 누군가는 날 넘겨짚어 깔봤다. 깔보진 않더라도 내게 기대조차 걸지 않는 경우는 흔했다. 나는 눈치를 보느라 스텝이 꼬였다.
말 더듬은 특정 상황에 더 심해지곤 했다. 특히 스스로 자신없는 얘기를 해내야할 때, 나는 입을 떼기 어려워했다. 그런 순간이 쌓이면 아예 3달, 길게는 1년 넘게 말을 심하게 더듬는 상태가 계속되기도 했다.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에만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자신감이 낮아졌다. 힘든 시간이었다. 뭘 하든 말 더듬이라는 장애물이 버티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걸 뛰어넘어야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텐데 그게 안 되니 시작도 전에 발목을 잡히는 것 같았다.
몇 개월 전 웨비나에 연사로 참여해달라는 섭외가 들어왔다. 제안이 들어왔을 뿐인데 손에 땀이 맺혔다. 특히 남 앞에 서면 말 더듬이 심해지는 내가 웨비나라니.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섭외를 부탁한 사람은 내가 말 더듬는다는 사실도 모를 터였다. 말 더듬으로 행사를 망친다면 날 미워할 거였다.
말 더듬이 걱정되면 못 한다고 하면 될 텐데 나는 또 거절하기가 싫었다. 사람들 앞에서 보란듯이 내 생각을 얘기하는 건 내가 오래 전부터 가져왔던 꿈이기 때문이다. 말을 못한다는 결핍 때문에 생긴 꿈이었는진 알 수 없지만 그런 기회가 생기면 정확히 하고 싶은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반반씩 들었다. 뒤로 빼는 게 익숙한 나지만 그때는 왜인지… 승낙을 해버렸다. 아직 몇 개월이나 남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어떤 준비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희한하게도 연사로 나서겠다고 말한 후에 말 더듬이 조금씩 나아지는 순간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웨비나가 가까워 올수록 말 더듬은 계속해서 나아졌다. 한 두달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내도 가족도 동료들도 그 변화를 뚜렷하게 느낄 정도였다. 미팅에서 말을 전혀 막히지 않고 해낸 순간이 쌓였다. 급기야 웨비나가 다가왔을때 말 더듬에 대한 걱정은 거의 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
모든 일이 그렇듯 말 더듬도 원래 나아졌다가 심해졌다가 한다. 심할 때가 훨씬 많지만 분명 좋아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만큼 급격하게 또 안정적으로 좋아진 적은 거의 없었다. 스스로도 의아했다. 아내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나 왜 말 안 더듬어?”
돌아보면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다. 난데없이 말이 잘 나오던 순간, 갑자기 청산유수가 되던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남들 앞에 서야 하는 순간에 나는 갑자기 말을 잘하곤 했다. 군대에서 점호 방송을 해야했을 때나 회사에서 발표를 해야 했을 때 그랬다. 지원은 나를 무대체질이냐며 놀렸다. 남 앞에서 말해야하는 시간들을 늘상 피해왔기 때문에 종종 그런 경험을 하면 스스로도 황당했다.
대체 왜 그런건지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일이 이번에도 일어난 걸까? 정말 긴장해야 마땅한 상황일수록 나는 말을 덜 더듬는 걸까? 진짜 무대체질인거야 나?
어찌됐든 나는 웨비나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지금까지도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말을 덜 더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론 가끔씩 튀어나오긴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내게 말 더듬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거의 더듬지 않는다. 이 사실이 얼떨떨하기도 행복하기도 하다.
요즘은 말할 기회가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아니 조금만 주저하다가 나선다. 이 기세를 몰아나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최근에는 토크 콘서트에 나가기도 했다. 이번에도 섭외가 왔을 때 관계자에게 “그런데 제가 말을 더듬어서요… 괜찮을까요?”라고 말했지만 약한 모습이 무색하게 실전에서 나는 말을 잘했다.
말을 더듬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내 맘 한 켠엔 불안이 있다. 언제 다시 말 더듬이 심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다. 살면서 몇 번이나 괜찮은 시기와 괜찮지 않은 시기를 보내왔기 때문에 합리적인 불안이다.
언젠가 학교 선배를 만나 술을 한 잔 한 적 있다. 어느 때보다 말을 심하게 더듬고 있던 때였다. 회사에서도 역할이 커지기 시작했어서 심란했다. 더듬는 말투로 고민을 꺼냈다.
“요..ㅇㅇ요 요요즘 말이 너무 안 나와서 ㄱ..거거걱정이에요.”
선배가 답했다. “기억나? 한 3년 전에 너가 갑자기 전화해서 ‘누나 저 이제 말 안 더듬어요!!’라고 말했어.”
그 대화는 이상하리만큼 맘 속 깊이 남았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는 게, 그런 말을 스스로 했던 기억도 잊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내 생에는 나아지는 순간보다 심해지는 순간이 더 많았지만 말이 잘 나올 때는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선배와의 대화 이후 나는 다시 말 더듬이 나아지는 순간이 오면 그때의 기분을 부여잡겠다고 결심했었다. 또다시 말을 심하게 더듬게 되더라도 말을 더듬지 않았던 기억은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랬다간 영영 말 더듬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요즘 나는 웨비나의 순간을 붙잡으며 무대체질이냐는 놀림을 기꺼이 받아내며 지내고 있다. 전보다 훨씬 말을 덜 더듬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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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forms.gle/KGPQEEfyTx6564Mk7
맨 위에 있는 그림은 제 아내 지원이 그렸습니다. 지원은, 제가 뭘 이렇게 저렇게 쓰겠다고 하면 "정말 그랬어?"라고 꼭 물어봐요. 정직하게 쓰겠다고 다짐하지만 늘 적다보면 조금씩 과장하거나 없던 이야기를 살짝 집어넣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든요. 지원의 말을 들으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쓰는 태도를 갖게 돼요. 그렇게 쓴 글은 훨씬 마음에 들고요. 아마 읽는 여러분께도 그런 것들이 다 티가 나지 않나 싶습니다. 계속 솔직하게 쓸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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