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무엇인지? 지금의 나는 망설임 없이 여름이라고 답할 것이다. 한 편으론 이 대답이 스스로도 놀라운데 나는 더위에 취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날씨가 더워지면 누구보다 힘들어한다. 가장 먼저 “덥지 않아요?” 묻는 사람이 나다. 5월 말부터 에어컨을 틀까 고민하는 사람이 나다.
더위와 습도가 유발하는 증상이 보통 사람보다 심한 사람도 나다. 땀이 쉽게 나고 피부가 예민해 습기에 몸부림친다. 모발이 얇아 머리는 순식간에 엉망이 된다. 간지러움이나 숨막힘이나 용모가 흐트러지고 있다는 위기감은 쉽게도 멘탈을 흔든다. 땀이 더 나고 걷잡을 수 없어진다.
10개 정도는 더 댈 수 있는 이유들 때문에 여름을 싫어했었다. 좋아하는 계절을 대라면 당연히 겨울이었다. 춥더라도 줄줄 땀을 흘리는 상황만 피할 수 있다면 만족했었다.
그런 내가 이제는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사실이다. 요즘의 나는 분명 여름을 좋아한다. 여름이라는 이름에서부터 활기가 느껴지고 건강하게 숨 쉬는 나무와 식물이 상상된다. 반짝이는 바다가 떠오르고 한껏 멋부린 휴가지 사람들이 그려진다.
여름을 기대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놀랐다.
그리고 '나 왜 여름을 좋아하게 됐지?'라는 의문을 던졌을 때 특정하고도 구체적인 순간이 부드럽게 떠올랐다.
2년 전 전 직장에 다닐 때였다. 제주도로 2주간 리프레시 휴가를 갔다. 난 심적으로 지쳐 있었다. 8월은 휴가로서 적절하지 않은 시기라고 생각했는데도(물론 더위 때문에)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마음에 무작정 떠났다. 혼자 멍때리며 보낸 며칠이 지나고 지원이 제주로 내려왔다. 더위 때문인지 마음이 무거워선지 지원이 왔는데도 나는 축 처져 있었다. 운동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휴가를 보낸지 3일쯤 되던 날 일어나자마자 해안가를 함께 뛰었다.
짧은 러닝을 마치고 도착한 이호테우 해변에서 우리는 어떤 준비도 하지 않고 물로 뛰어들었다. 8월의 제주였기 때문에 옷이 젖어도 금방 마를거란 계산이었다. 바다는 맑았고 햇살이 비쳐 물 속이 다 보였다. 이따금씩 구름이 지나가면서 햇빛을 부분적으로 가렸는데 그덕에 군데군데 비쳐진 바다가 더 다채롭게 보였다. 물은 선명한 에메랄드 빛이었고 하늘은 새파랬고 행복한 사람들의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고작 십오 분 정도 물에 뛰어들어 놀았던 그때 나는 오랫동안 붙어있던 걱정과 근심이 떨어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는 일이 해결된 게 없더라도 기분은, 삶은 나아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지독한 번아웃과 무기력에 빠져있던 내가 그 순간 다시 움직일 힘을 얻었다. 오로지 그 기억 때문에 일어설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정신 차리고 다시 길을 찾아볼까’라는 생각을 마침내 할 수 있었다.
어떤 순간은 그 순간 만으로도 삶을 더 잘 살 수 있게 만든다. 내겐 제주에서의 15분이 그랬다. 지금도 침대에 누워 잠이 오길 기다리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할 때면 그 순간이 떠오른다. 떠오르면 애틋함이 맘 속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 올라온다. 애틋함이든 따뜻함이든 즐거움이든 그 기억이 몰고오는 감정은 나를 더 잘 살게 했다. 조금 더 웃게 했고 좀 더 친절하게 했다. 조금 더 침착하게 했고 좀 더 낙관하게 했다. 사람을 바꿀 만큼 내겐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아가 여름이라는 계절 자체가 좋아질만한 순간이었다.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라고 소리내어 말하고 나면 여름의 좋은 모습들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지난 주에는 지원과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여름의 끝판왕적인 순간을 모아놓은 듯한 그곳에서 나는 더없이 행복했다. 숨막히는 공기나 까맣게 탄 피부마저 소중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언가가 싫다는 이유로 좋아했던 계절이 겨울이었다. 여름은 좋아하게 된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기 시작한 계절이다. 계절을 좋아한다는 것은 3개월 어쩌면 그 이상을 다른 때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일이 없어도, 단지 그 계절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가올 여름마다 조금씩 더 즐거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한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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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
오 저도 더위를 많이 타서 끈적이는 여름이 싫었는데.. 두부님 글을 읽으니 여름이 달리 보이네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뭔지 생각해봐야겠어요.. ♬ 읽으면서 들을 노래 추천 : 책을 넘기는 듯한 마음으로 - homez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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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킴
두부님의 글을 읽다보니 저도 힘들때마다 위로가 되었던 제주도 바다의 풍경이 생각이 나요.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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