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섯

2025.03.05 | 조회 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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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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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간의 두부

격주로 에세이를 씁니다!

새해 첫 날 해돋이를 보기 위해 지원과 아차산으로 향했다. 새해는 삼십 번 넘게 맞았지만 첫 해를 보러 간 건 처음이었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아차산역으로 가는 길, 아침 잠이 많은 나는 몽롱했다. 오랜만에 이른 시간에 깨 있다보니 반쯤은 꿈 속인 기분이었다. 역에 내려도 마찬가지였다. 칠흙 같이 어두운 산 길을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걸었다. 말 없이 뒤를 따르는 나는 꿈 속의 엑스트라가 된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새로운 해가 시작됐다는 걸 실감은 하고 있을까. 나부터가 지금 왜, 뭘 향해 걷는 건지 가물했다.

우린 정상까지 올랐지만 해를 보지 못했다. 하늘이 흐려서 날이 밝아도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미련이 남은 사람들은 한참을 정상에 서 있었다. 우리는 빠르게 포기하고 올라왔던 길을 반대로 내려갔다. 중턱 쯤 왔을 때 두터운 구름 사이로 해가 반의 반 정도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멈춰서서 그 작은 조각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도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해를 조각으로라도 봤으니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날 저녁 나는 지원과 살짝 다퉜다. 너무 일찍 일어나 피곤해서인지 나서서 갈등을 해결할 힘이 나지 않았다. 좀 쉬고 싶다고 말한 뒤 방문을 닫고 쇼파에 엎드렸다. 철 지난 영화를 다시 돌려봤다. 줄거리도 장면도 다 아는 작품이었다. 힘이 나지 않을 때면 늘 본 영화를 또 봤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나의 회복 방식이었다.

문득 한 살 더 먹은 내 나이가 실감됐다. 서른 여섯. 올해 나는 한국 나이 서른 여섯이다. 어린 시절의 내게 서른 여섯 살은 말도 안 되게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러운 사람. 자동차 접촉사고 같은 돌발 상황에 처해도 서른 여섯 쯤 되는 동승자가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서른 여섯 씩이나 먹은 만큼 상황 대처 능력이 좋을 테니.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을 때는 주변의 서른 여섯 살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다. 분명 이런저런 경험이 많을 테니.

정작 쿠션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엎드려 있는 서른 여섯의 나는 작은 갈등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원과의 다툼은 금방 풀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러고 있는 내가 더더욱 어른답지 못해 보였다. 적어도 서른 여섯이라기엔 좀 너무 많이 서툰 느낌이었다.

언젠가 얕게 알고 지내던 선배가 말했었다. “마흔 넘으면 사람은 변하지 않아”.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더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그 기준이 정말 40인지 알 수 없지만 사실이라면 내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지금의 모습으로 굳어질지도 모른다. 말라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멘트처럼.

“그래서 나이 먹는게 X같은 거야.” 선배는 덧붙였었다. 그가 더이상 변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계속 변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최근에, 그러니까 서른 다섯의 끝자락부터 서른 여섯 초반에 이르기까지 내가 새롭게 깨달은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이런 것들이었다. 음식은 시키는 것보다 직접 해먹는 게 좋다. 요리를 하면 성취감도 있고 지원과의 시간도 알차게 보낼 수 있으며 몸에도 좋다. 숏폼을 보는 것보다 시간들여 책을 읽는 게 낫다. 천천히 문장을 읽는 시간이 머리를 쉬게 하면서도 양질의 인풋을 주기 때문에 뇌에도 좋다. 운전을 해서 출근을 하는 것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낫다. 운동을 따로 하려고 하기보다 일상에 움직임을 최대한 많이 만드는 편이 현명하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인데다 초등학생 같은 깨달음이어서 웃음이 났다. 서른 여섯 쯤 되면 더 대단한 인사이트가 가득할 줄 알았다. 내가 사십 살이 되면 어떨까. 그 때도 별 것 아닌 깨달음에 감탄하고 있을까. 그러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런 것들은 몸에 배어 있고 나는 더 그럴듯한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할텐데…

방문이 열리고 지원이 말했다. 아직도 삐쳤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나가서 좀 걷자. 좋아.

외투를 챙겨입고 지원과 손을 잡고 동네를 산책했다. 추워서 내 점퍼 주머니에 맞잡은 손을 넣은 채로 걸었다. 문득 혼자 살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산책도 거의 하지 않고 밥도 맨날 시켜먹어서 늘 몸이 무겁고 속이 안 좋았다. 새삼 가벼운 발걸음이 낯설고 소중하게 여겨졌다. 지원을 만나고 나서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은 대단한 인사이트가 생겨서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서른 여섯을 잘 보내보자고 속으로 다독였다. 집 앞 공원에 오르자 달이 또렷하게 보였다. 언제 흐렸냐는 듯 맑은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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