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마라토너에게 보내는 응원

2025.02.24 | 조회 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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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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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간의 두부

격주로 에세이를 씁니다!

제주여행 첫 날 통풍이 도졌다. 통풍은 배출되어야 할 요산이 몸에 쌓여 발생하는 병이다. 결정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쌓이면 아프다. 중력 때문인지 고통은 보통 발 끝에 모인다. 바람만 불어도 아플 정도로 통증이 심해 통풍이라 불린다고 했다. 하필이면 지쳐서 떠난 여행 첫 날에 그 병이 왔다. 

내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주사를 맞고 약을 탔다. 엄지 발가락 관절에 맞은 주사는 인생에서 느껴본 고통 중 가장 컸다. 의원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대기실로 절뚝거리며 나오니 동네 할머니들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병원 문을 나섰다.

통풍이 도지면 먹는 걸 조심해야 한다. 요산을 만들 수 있는 음식을 피하고 몸에 쌓인 것들을 배출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숙소에 도착해 샐러드를 시켰다. 토마토가 통풍에 안 좋다는 얘기가 있어서 그조차 골라내며 먹었다. 허기만 겨우 넘긴 채 누워서 책을 봤다. 질리면 영화를 보다가 또 다시 책을 읽었다. 좋은 뷰를 자랑하는 숙소였지만 누워있는 내겐 흐린 하늘만 보였다.

하릴없이 누워있는 시간동안 수많은 생각이 찾아왔다. 몸 여기저기에 숨어있던 생각들이었다. 대부분 독 같은 것들이었다. 깊게 들어갈 수록 삼천포로 가게되는 생각들. 비합리적인 불안을 가져오는 생각들. 나는 요산을 몸 밖으로 배출하듯 필사적으로 독 같은 생각들을 빼내려고 애썼다. 그 생각들이 쌓여 배출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지쳤던 것일지 모른다. 결정화된 요산이 몸에 쌓여있어 지금 이렇게 아픈 것처럼.

반 년 정도 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살았다. 열심히 했단 말하곤 좀 다르다. 빈둥빈둥 쉬어도 일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일이 안 되면 자질이 의심받을까 두려웠다. 일이 잘 되어 내가 한 줌 만큼의 주목을 받을 때 그 꼴을 달갑지 않게 봤던 이들이 흡족해하게 될까봐 무서웠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우스워지는 그런 생각을 나는 지난 6개월간 달고 살았다. 결과가 안심시키기 전 까지 내 마음은 온통 일 생각 뿐이었다. 업무 메신저를 놓지 못했다. 영혼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지치고 녹초가 됐는데도 계속 밀어붙였다.

그런 내가 제주에 와서, 통풍에 걸려 이틀 가까이 누워만 있었다. 친구의 조언으로 회사 메신저는 삭제한 채로, 휴대폰을 거의 보지 않은 채로. 몸과 마음에 계속 쌓아왔던 독이 빠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천천히, 느린 속도로 고통이 잦아들었다. 비어가는 속을 읽은 책의 문장들과 본 영화의 장면들이 채웠다. 문장과 장면들은 전혀 내게 해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사흘 째 되던 날 나는 웬만큼 걸을 수 있게 됐다. 숙소를 옮겨야 했고 다음 날에는 지원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새 숙소는 해안도로에 위치한 집이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분명 경치는 끝내줬을 것이다. 엄청 흐린데다 눈보라가 쳤기 때문에 하늘과 바다가 잘 구분되지 않았다. 외풍이 너무 심해 집 안까지 바람 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들어왔다. 큰 맘 먹고 예약한 숙소였는데 지원이 내려오면 실망할 것 같아 걱정했다.

다음 날 지원을 맞으러 공항에 가는 길 도로에 햇살이 비쳤다. 다행이었다. “날씨 요정이네” 우리는 웃으며 얘기했고 같이 저녁을 먹고 어두워진 뒤 숙소에 돌아왔다. 내일 아침도 날씨가 좋다면 집에서 보는 경치는 완전 끝내줄 거야. 기대감에 젖어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날은 추웠지만 날씨는 좋았다. 경치는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파도가 치는 물 길 한 가운데를 햇살이 비췄다. 수평선 부근에선 풍력 발전기가 천천히 돌았는데 그게 운치를 더해줬다. 우리는 느즈막히 일어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봤다. 언젠가 이런 집에 살게 된다면 많은 걸 포기해야 한다 해도 괜찮으리라.

그토록 아름다운 해안도로에 승합차가 한 대 섰다. 너댓명의 인원이 내렸다. 공사장에서 입을 법한 형광 잠바를 입고 있었다. 차에서 꼬깔콘을 내리더니 도로에 배치했다. 차량을 통제하는 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사람들이 떼로 나타났다. 그들은 달리고 있었다. 배에 번호표를 단 채로. 마라톤이 열린 것이다. 마라톤의 코스가 숙소 바로 앞을 지났던 것이다.

거실 마룻바닥에 앉아 마라톤을 바라봤다. 잠옷을 입은 채로 마라톤 1열 직관을 할 수 있다니 행운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러너 중 한 명이 우릴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깐 놀랐지만 이내 우리도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비슷한 광경은 계속 보였다. 승합차에서 내렸던 안전 요원은 러너가 지나칠 때마다 있는 힘껏 박수를 쳤다. “화이팅! 잘한다!”하고 모든 사람에게, 수백 명은 족히 되어보이는 참가자들에게 한 명도 빠짐없이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계속 보고 싶었다. 타인이 타인에게 잘하길 바란다는 마음을 그렇게나 열렬히 보낸다는 게, 낯설고 사랑스러웠다. 이상하게도 그 풍경을 보고 있는 것 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회복되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어디선가 적이 있었다. 타인의 행복을 바랄 우리는 행복해질 있다는 말을. 이해가 됐었다. 내가 되어야지 행복한 아닌가. 그러려면 응원이 나를 향해야 하는 아닌가. 그러나 마라토너를 응원하는 안전 요원을 바라볼 내가 느꼈던 환희는 내게 성공이 찾아왔을 느꼈던 것보다 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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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정독사 의 프로필 이미지

    화정독사

    0
    2 months 전

    몸과 마음이 힘들었을 텐데 소소한 일상을 즐기면서 낯선이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 저도 행복합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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