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배우인 친구 J를 만나 수다를 떤다. 한 번은 내가 기분에 따라 태도나 일의 효율, 결과가 너무 달라져 고민이라고 했더니 J가 네 고민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배우는 늘 기분과 싸워야하는 직업’이라고 답했다. 대본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게 배우의 일이니까 자신의 기분을 철저히 숨길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기분과 싸워야 한다는 말은 막막하게 들렸다. 내게 기분이란 모든 걸 순식간에 휘말아 돌려버리는 힘을 가진 거였기 때문이다. 나는 순식간에 기분에 말려들어가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도 우울해하곤 했다. 너는 그 막막함을 뚫어내고 일을 해내고 있구나. J에게 말하는 순간 내 맘 속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요가 수업을 처음 들은지도 꽤 지났다. 꾸준하지 못해서 잘하진 않지만 이젠 수업의 남자가 나 혼자여도 어색하지 않다. 자세 이름만 들어도 자동으로 몸이 움직인다. 킥복싱이나 헬스같은 동적인 운동도 해봤지만 이제는 요가가 내게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요가의 가장 좋은 점은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뭔가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는 점이다. 몸의 움직임이 다양하고 호흡의 흐름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또 그걸 깊게 들여다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 번은 수업을 시작하며 선생님이 말했다. “기분이 기의 분배라는 뜻인 거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기가 고루 분배되는 동작을 해볼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눈에 보이는 흐름으로 느껴졌다. 기분이 안 좋다면 기가 몸에 골고루 배분되지 못한 거구나! 선생님의 말에 따라 정신을 몸의 특정 부위로 집중하니 기가 거기로 모이는 걸 느꼈다. 어딘가에 꽁꽁 뭉쳐있던 기를 배로, 머리로, 손 끝으로, 발 끝으로 보냈다. 기가 온 몸에 골고루 퍼져 정돈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기분, 그러니까 그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내가 기분이라고 느꼈던 그것이 굉장히 가벼워졌음을 체감했다.
수업 이후 기분을 통제 가능한 거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전에는 기분이 상하는 이유를 외부로만 돌렸다. 누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날씨, 의도와는 상관없이 틀어져버린 일 같은 것들이 기분을 이리저리 휘두른다고 느꼈다. 외부에 있는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만 비로소 기분이 풀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운되는 건(기분이 상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분의 통제권은 내게 없었다. 영향받을 때마다 무력히 꺾일 뿐이었다. 그런데 기분이라는 게 알고보니 기의 흐름이었다는 말을 듣고 나니 희한하게도 ‘어떻게 잘 하면 컨트롤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수업을 듣고나서 다시는 기분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그런 게 간단히 될 리 없다. 다만 세상 일에 꺾여 마음이 깎일 때 무력히 휘어잡히던 내가 말려들어가는 기분을 붙잡고 잠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딘가에 꽉꽉 뭉쳐버린 기를 조금만 더 넓게 분배해보자고. 기를 고루 분배하기 위해 두 눈을 감고 집중하다보면 내 마음의 공간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마음의 공간은 내 몸 전체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발 끝부터 손 끝까지 개미집처럼 꼼꼼하게. 기는 온 몸을 순환하는 피처럼 마음의 공간을 돌아야 한다. 제 기능을 못하고 있을 때는 몸을 움직여 피라도 돌게 하거나 정신을 몸 전체로 집중해 기를 퍼지게 해야 한다. 이를 알고 믿게 되는 것만으로 전보다는 기분에 덜 휘둘리게 되었다.
나는 최대한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에, 행복할 때 내 마음의 공간은 보통 어떤지 떠올려본다.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자면 햇빛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같다. 동전만한 빛이 가슴 한 가운데 들어온 뒤 온 몸으로 퍼지는 것 같다. 햇볕이 충분히 들어오는 방에 누워있을 때 느껴지는 적당한 따뜻함, 속을 쓸어내리는 뜨거운 차를 첫 모금 마셨을 때의 만족감이 생각난다. 유독 맑았던 날 지나치는 사람들이, 건물들이, 가로수가 결이 좋은 햇살을 맞고 있던 모습을 보며 ‘세상 모든 건 햇볕에 담기는 순간 5배 이상 아름다워지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적 있다. 행복할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의 공간을 돌아다니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요가원이다. 요가 수업을 마무리할 때는 꼭 사바아사나를 한다. 사바아사나란 ‘송장 자세’라는 뜻으로,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몸과 마음에 집중하는 자세다. 사바아사나를 할 때 나는 내 신체와 가장 멀리 떨어진다고 느낀다. 1분, 2분… 잡생각이 온 몸 구석구석에 머물다가 조금씩 사라진다. 그러다보면 가슴 언저리나 어깨 너머, 혹은 손끝 어딘가에 뭉쳐 있던 기가 슬며시 풀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문득 마음이 하나의 방처럼 느껴진다. 닫혀 있던 창문을 열어 햇빛이 스며들듯, 그 방 안으로 따뜻함이 들어오면 나는 조금 더 괜찮아진다. 기분은 그렇게 조금씩 달라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의 말이나 날씨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의 방을 어떻게 열어두었는지에 따라 말이다.
레터 명을 바꿨어요. <2주간의 두부>에서 <두부의 산문>으로... 2주라는 텀은 잘 못 맞추겠더라고요. 너무 길어서 쓰고 싶을 때 못 쓰는 게 아쉽기도 하고, 너무 짧아서 마음이 쫓기기도 하고... 되도록 2주보다 짧은 텀으로, 더 많은 글을 수시로 쓰고 싶어서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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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첫 산문집 <말 더더더듬는 사람>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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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리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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