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실 생각도 있나요.
공주의 한 책방에서 북토크를 마친 직후 그런 질문을 받았다. 말문이 막혔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참 뜸을 들인 뒤 거짓말도 진담도 아닌 대답을 했다.
“그럼요. 기회가 된다면 꼭 하고 싶어요.”
‘그럼요’라고 얘기했지만 실은 한 번도 사회에 기여한다는 관점에서 내가 하는 일을 생각한 적 없었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꼭 하고 싶다’는 얘긴 진심이었다. 짧은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 질문을 하신 분은 덧붙였다.
“저는 교수고, 언어 장애를 연구하고 있어요. 7월에는 말더듬이 있는 아이들이 모이는 캠프가 열리고 10월에는 세계 말 더듬의 행사가 있어요. 그때 작가님을 초대하고 싶어요.”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겸손하게 뜨려고 애썼다. 세계 말 더듬의 날이라니. 25년이나 말 더듬을 안고 살았으면서 그런 날이 있는지도 몰랐다. 긴 시간동안 세상에 말 더듬이는 나 뿐이라고 느껴왔는데 말 더듬는 아이들이 모이는 행사가 있었다니. 스스로의 무감각함에 놀랐고 마땅히 관심가져야 할 곳에 무심했던 것 같아 부끄러웠다. 교수님과 명함을 주고 받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내게 어떤 걸 기대하시는 걸까.
교수님은 내 책을 읽고 거주하는 대전에서 북토크가 열리는 공주까지 오기로 마음 먹었다고 하셨다. 연구나 논문, 캠페인보다 책에 담긴 이야기가 사람들의 인식을 더 효과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도 하셨다. 나는 좀 과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쩔 줄 몰라했다. 교수님은 다시 연락하겠다며 인사했고 나는 멀리서 찾아와주셔서 감사하다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점 옆 제민천을 걷는데 인생의 모토로 삼겠다고 마음 먹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구호나 당위가 아니라 이야기다.
이야기의 힘 때문에 교수님의 눈에 내 책이 띄었다. 말 더듬는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대놓고 풀어내는 건 드물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순간 묵직한 임무가 내게 내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절대적인 누군가가 단호히 얘기하는 것 같았다. 너도 이제는 남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해, 네 이야기를 세상에 풀고자 마음 먹었으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움직여야 해, 라고.
교수님께 연락이 온 건 두 달쯤 지나서였다. 공주에서 느꼈던 행복은 조금 시들해진 뒤였다. 나는 여름 휴가를 다녀온 뒤 다시 일상에 말려들어가 이런저런 성취와 실수를 번갈아 겪으며 지냈다. 여독 때문인건지, 문득 돌아보니 권태가 생활 전체에 은은하게 묻어있었다. 관성으로 일하는 면면들이 참기 힘들어졌고 게임도, 책도 나를 즐겁게하지 못했다. 더운 날씨는 불쾌감을 안고 일상을 휘감았다. 종종 권태를 인지하고 붙잡아 생각했다. 이 권태는 대체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떼어내는가. 결론은 늘 비슷했다. 권태란 쉽게 싫증을 느끼는 내 성정상 완전히 떼어내긴 어려운 것이다, 안고 살아가야 하는 감정이 권태다. 그렇게 힘빠지는 생각들을 하며 지내던 내게 교수님의 연락이 온 것이다.
말 더듬는 아이들이 모이는 캠프가 곧 열린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40분 정도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면 된다고 했다. 딱히 PPT나 발표를 준비할 필요는 없댔다. 그저 말 더듬을 안고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유롭게 얘기하면 된다고. 편하게 오라는 얘기를 듣고서도 긴장감이 들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북토크는 더이상 떨리지 않았는데 아이들을 만난다니까 오히려 떨렸다.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다 클 때까지 나만큼 말 더듬는 사람을 만난 적 없었다. 나만큼 말을 더듬어봤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본 적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사람을 만났다면 말더듬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가짐이 꽤나 영향을 받았을 거란 건 알 수 있었다. 말 더듬는 어린이는 성인이 됐을 때도 말을 더듬을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먼저 말 더듬는 삶을 살아본 어른의 이야기를 듣고싶어 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듣고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나이를 먹어서도 말 더듬에 허우적대고 있는 삶을 본다면 어쩌나.
그 자리에 가서 말 더듬에 힘들어하고 있을 아이들에게 “나도 말을 더듬었고, 지금도 조금씩 더듬는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어엿한 모습을 보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가 아니라 ‘그러나’로 문장을 이어야 할 거였다. “나도 말을 더듬었고, 지금도 조금씩 더듬는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다.”
아이들을 대해본 적이 많지 않기에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그리며 준비했다. 당일에는 면도도 신경써서 하고 최대한 깔끔한 옷을 입었다. 행동 하나하나 조심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아직까지 내게 남아있는 어린시절 기억을 떠올려보면 오래 남을거라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우연히 남아있는 기억들이 내 성격이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거라 생각하면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으로서 조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캠프가 열리는 서울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안내받은 장소로 이동하는데 큰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장기자랑이 펼쳐지고 있었다. 생각보다도 어린 아이들이 한 명씩 나와 망설임도 없이 각자의 장기를 펼쳤고 작은 공연들이 하나하나 끝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조금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는데 예상했던 분위기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말 더듬는 아이들은 말 더듬을 숨기고 싶기 때문에 내성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캠프에 참여한 아이들은 너도나도 무대로 나서고 싶어했다. 다분히 외향적인 그 자리를 불편해하는 아이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말 더듬이 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과 시간을 갖기 전 담당자 분들과 얘기하는 자리에서 걱정을 내비쳤다. 생각보다도 아이들이 더 어려서, 제가 할 이야기가 너무 어렵지 않을까요. 담당자님은 아이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스마트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미 그 말에 한 방 얻어맞은 기분으로 질문을 하나 더 했다. “애들이 생각보다 말을 안 더듬는 것 같아요.” 담당자님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말 더듬이 다들 티가 날 만큼 있지만, 캠프에서 말을 더듬어도 계속 말을 하도록 유도하다보니 듣는 입장에서도 더듬는 게 잘 보이지 않는 거라고 했다.
준비를 잘못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캠프는 말 더듬을 고치는 방법이 아니라 말을 더듬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말더듬을 숨기거나 고치려고 애쓰기보다 더 공개적으로 말더듬을 내보이며 자기 표현이라는 본질에 집중하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엿한 모습을 보여야한다는 생각에 어떻게 말 더듬을 ‘극복’했는지 최대한 꾸며 말하려고 했다. 20분 정도 여유가 있어서 로비에 앉아 아이들과 어떤 대화를 할지 처음부터 되새겼다. 원래 이런 발표가 있으면 메모장에 할 말을 써두는 데 이 자리에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최대한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듯했다. 눈을 감고 말을 더듬으면서도 나다움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얘기하는 게 맞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스무명의 아이들 앞에 마이크를 들고 앉았다.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었다. “저에게도 말 더듬이 크게 있었어요.” 원래는 이 얘기를 한 뒤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시작으로 내 생의 반전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얘기하려고 했다. 그 생각은 접어두고 얘기했다. “말을 더듬든 안 더듬든 저는 나서길 좋아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제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고요. ‘그래서’ 저는 말 더듬는 제 이야기를 마음껏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이거 보세요. (책을 내보이며) 말 더듬으로 책까지 냈어요!” 말 더듬을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무기로 썼다는 얘기를 아이들은 흥미롭게 듣는 것 같았다. 짧은 발표를 마치고 질문을 받는데 열 명 가까운 아이들이 앞다퉈 손을 들었다. 수준 높은 질문이었다. “말 더듬을 내보이면 좋은 게 뭐예요?”, “저는 제 이야기를 시로 쓰는 걸 좋아하는데, 자꾸 포장하게 돼요. 정직하게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나는 하나하나 깊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답변을 건넸다. “말 더듬은 내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만들어줘요.”, “글을 쓸 때야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그게 마음을 치유해주기도 해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걸 포장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질문이 계속 쏟아져 담당자님이 아이들을 말려야할 정도였다. 곧 다음 일정이 있는데도 다들 싸인을 받겠다고 줄을 섰다. 결국 선생님이 아이들의 노트를 걷어 대신 싸인을 받아주기로 한 뒤에야 다들 다음 일정이 열리는 장소로 흩어졌다. 나는 스무 권의 노트에 하나하나 꾹꾹 눌러 메시지와 싸인을 썼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해서 교수님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라탔다. 돌아오는 길 아이들 모두에게 내 책을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말더듬과 싸워나갈 아이들의 책장에 내 이야기가 담긴 책이 꽂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판사에 연락해 책이 얼마나 남았냐고 여쭤보았다. 다행히 모든 아이들에게 줄 만큼 있다고 했다. 캠프가 끝나기 전 퀵을 보내달라고 요청드렸다. 사연을 들은 출판사에서는 흔쾌히 도와주셨다. 다시 일에 몰두하고 있던 중에 교수님께 연락이 왔다. 아이들에게 책이 모두 전달됐다고 했다. 아이들이 기뻐하기를 진심으로 바란 뒤, 잠시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댔다. 오랜만에 권태가 깨끗이 쓸려 내려간 기분이었다.
레터 어떠셨어요? 아래 링크를 통해 자유롭게 소감을 남겨주세요. 정말 정말 제게 엄청난 힘이 됩니다!
https://forms.gle/KGPQEEfyTx6564Mk7
제 첫 산문집 <말 더더더듬는 사람>이 출간되었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