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바쁘다. 물리적으로도 바쁘고 압박도 대단해서 정신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럴수록 잘 쉬어야할 텐데 그게 잘 안 된다. 일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도 있고 애써 쉬려고 하는데도 쉰 느낌이 나지 않아 당황스럽다.
쉬어도 쉰 기분을 만나지 못한 채 바쁜 일상을 계속 보낸지 오래되었다. 이렇게 사는 것의 단점은 많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걸 잘 보지 못하게 된다. 본래 나는 작은 것에 깊게 감동받는 사람이다. 좋은 날씨나 풍경 같은 것에 행복해하고 기분을 이겨내곤 했는데 요즘은 그런 게 없다. 좀 시니컬해졌다고 할까 작은 아름다움 - 무용하면서 그 자체로 빛나는 어떤 것- 에는 마음을 쓰기가 어렵다.
이동진 평론가가 그런 말을 했다. 바쁜 건 악에 가깝다고. 할 일에 쫓기는 사람일 수록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할 확률이 높다는 실험 결과를 소개하며 그 얘길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살짝 내려앉았다. 바쁘면 시니컬해지는데 그건 분명 악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은연 중에 알고 있었지만 겁이 나 외면해왔던 명제를 그가 짚어준 느낌이었다. 그저껜 회사 연말 파티가 열렸는데, 사주와 타로카드를 보는 분이 오셨다. 이것 저것 묻더니 표정이 어두워졌고 자신을 잘 돌보라고 했다. 내가 뽑은 왕이 그려져있는 카드를 가르키며 “왕인데, 표정은 행복해보이지 않죠?”라고. 하는 일에서 인정은 웬만큼 받겠지만 그 사이 많은 걸 잃어버릴 수 있으니 잘 살피라는 얘기였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과 묘하게 연결되는 구석이 있었다.
이번 주말 모처럼 시간이 나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다 봤다. 드라마를 완주한 건 오랜만이었다. 승진 실패와 사기로 모든 걸 잃어버린 김 부장(류승룡)은 카센터를 운영하는 형(고창석)을 찾아간다. 형은 판에 박힌 위로를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형은 김 부장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이상 일거리가 없는 동생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할지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아들 졸업식도 한 번 못 갈만큼 바빠서 때론 악했고 많은 걸 잃어버린 김 부장은 형의 도움으로 조금씩 일어선다. 경제적으로 다시 일어선다는 게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 이를테면 주변에 늘 머무르던 사랑이나 아름다움을 비로소 보게 된다. 그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다름아닌 주인공의 형이라는 설정 때문에 나는 좀 더 몰입했다. 고창석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눈물이 났다. 특별히 슬픈 장면이 아니었는데도. 그리고 드라마가 다 끝났을 때 어떤 행복감을 느꼈다.
나의 형은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떠났기 때문에 그가 성인이 됐을 때 어떤 모습이었을진 아무도 모른다. 생각보다 훌륭한 사람은 못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제멋대로 상상한다. 형이 있었다면 분명히 바르고 든든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일찍 떠난 사람에게는 그렇게 기억될 행운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 생각과 함께 나는 괴롭지 않은 슬픔에 빠진다. 슬프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어쨌든 10살부터 나는 형 없이 컸기 때문에 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좀 실체가 없어서 억울하거나 힘들진 않다. 다만 분명 슬프다. 되돌릴 수도 없고 다른 설정은 겨우 상상만 해볼 수 있을 뿐이라는 게 명백해서 말이다.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드라마 <더 베어>. 최근 본 것 중 가장 마음에 깊게 남은 이야기들이다. 모두 주인공이 형을 잃어버린 이야기, 형에게 의지하던 마음이 갈 곳 없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내 이야기와 닮은 이야기를 찾고 싶어한다. 아무리 바빠지고 시니컬해지더라도 이런 이야기에서만은 나는 다시 슬픔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슬픔에 빠진다는 건 사실 꽤나 좋은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무 괴롭지만 않다면 말이다.
앞서 말한 3개의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형을 잃은 슬픔 속에서 잊고 있던 행복을 찾는 순간을 만난다. 분명히 슬픔에는 그런 성질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슬픔에 빠짐으로써 주변의 아름다움이 다시 보이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기쁘지 않은데도, 마음은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바쁠 때는 보지 못했던 얼굴과 말, 오래 머물러 있던 사랑 같은 것들이 슬픔 속에서는 천천히 떠오른다. 나를 괴롭히지 않는 한에서의 슬픔은, 내가 아직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바쁨이 나를 악에 가깝게 데려간다면, 슬픔은 다시 나를 사람 쪽으로 돌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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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느낌
와! 오래 기다렸던 글이네!^^ 좋은내용! 조금만 여유를갖고 천천히 가보도록!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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