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정원 여행은 제주 서귀포시에 위치한 베케(veke)로 정했다. 3년 전 홀로 제주 여행을 왔을 때 휴무일인지 모르고 방문했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베케. 마침 가족 여행이 제주로 잡히게 되어 제일 먼저 위시리스트에 넣어두곤 여행일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두어 달 전부터 <식물적용학>온라인 강좌로 정원 공부를 시작한 나는 요즘 머리와 가슴이 정원에 대한 사랑과 질문으로 꽉 찬 상태이다. 식물의 생리와 생태, 식재와 정원 디자인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내가 어마어마한 세계에 입장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눈으로 쉽게 즐겼던 아름다운 정원들이 얼마나 깊은 식물에 대한 이해와 미적인 감각, 그리고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조성된 것인지, 사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그려내기 위해 얼마나 밀도있는 지식과 노동이 전제되어야 하는지 깨달으며 연신 감탄하는 중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겸손한 시선
베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극장처럼 어두운 카페 공간 전면에 초록 파노라마가 펼쳐지며 시선을 압도한다. 순간 숲 속에 들어선 느낌이랄까. 땅을 깊이 파내 카페 자리를 만든 내부 공간은 앉아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정원의 가장 낮은 곳까지 닿도록 설계되어 있어 돌 무더기 언덕과 이끼 정원을 바로 눈 앞에서 감상하게 된다. 창 앞에 아이들과 자리잡고 앉으려니 땅을 뒤덮은 다양한 색의 이끼와 풀들이 확대경을 댄 것처럼 크게 다가온다. 물기 가득한 땅을 덮은 작은 지피식물과 형광 연두색의 이끼들이 비로소 말을 걸어오는 순간. 자연을 바라보는 겸손한 시점을 선물처럼 건네는 공간 설계에 무릎을 치게 된다.
카페 한쪽 문을 열고 진짜 정원으로 들어서면 ‘제주 밭에서 나온 돌무더기’를 뜻한다는 베케(순 제주말이다)답게 검은 돌담과 그 사이를 채운 고사리와 이끼, 야생화의 조화가 반긴다. 돌담과 데크 앞으로 높낮이를 달리하며 펼쳐진 이끼정원과 빗물정원의 흐름에 고개를 끄덕이다 연핑크의 목련이 회색콘크리트 벽을 배경으로 우아하게 수놓아진 장면에서 시선이 멈췄다. 연핑크와 그레이라니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컬러 조합 아닌가. 날개처럼 활짝 열린 꽃잎 뒤로 거칠고 차가운 콘크리트 벽이 묵직하게 서 있는데 두 오브제의 조화가 숨막히게 아름다워 잠시 멍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대박’. 얼마 후 나도 모르게 이 단어가 입에서 흘러나와 버렸는데 땅과 식물로 이루어진 1차원적 그림이 아닌, 하나의 식물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펼쳐진 원경, 중경, 근경의 다양한 레이어가 완성하는 정원 풍경의 깊이를 그순간 깨달아 버린 탓이다.
이런 색감과 질감의 대비라니. 누군가에겐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장면일지 모르나 학부시절 미술을 전공한 내게는 두 오브제가 빚어낸 조형미가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게 느껴졌다. 식물을 식재할 때 계절마다 보여주는 색감과 수형, 나무의 볼륨은 물론 주변의 건축물과 시간에 따른 변화까지 예상했을 가드너가 이 계절 이 그림을 건네기로 작정하고 수고했을 순간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가드너는 진정 예술가구나.
취향과 치장이 아닌 생태를 반영한 정원
베케는 주변에서 만나는 흔한 정원처럼 평면의 땅 위에 취향대로 고른 식물을 채워넣어 완성된 인위적인 정원이 아니라 토양과 주변환경을 살피고 땅의 성격을 파악하여 만든 생태정원이다. 그래서 흔히 들어보지 못한 이끼 정원, 빗물 정원, 폐허의 정원, 그늘 정원 등 땅의 지형과 역사가 반영된 다양한 생태공간을 만날 수 있다. ‘모든 땅은 아름답고, 다만 그 땅과 어울리는 정원을 디자인해야 한다’는 김봉찬 정원사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눈앞에 펼쳐진 정원을 보며 알 것 같았다.
베케 정원을 걷는 내내 가장 흥분되었던건 땅에 떨어진 여러 색의 꽃잎과 식물의 잎사귀들이 한데 뒤엉켜 정원 곳곳이 컬러 파레트처럼 보이는 지점이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답게 어울릴 수 있을까. 나뭇가지에서 꽃피는 시기에는 하늘을 배경으로 그 색이 드러나지만 꽃이 져서 떨어지는 순간엔 바닥 공간이 어딘지에 따라, 주변 식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색감도 새롭게 빛을 발한다. 이 장면도 가드너의 머리속엔 이미 들어있겠지, 혼자 중얼거리며 걷는데 색으로 흥분된 마음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정원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여러 각도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형과 색, 어울림의 덩어리들을 만났다. 처음 보는 색과 형태의 꽃과 나무들, 낯선 식물조합이 만들어내는 이국적인 풍경들, 자연을 향한 찬양과 그 안에서의 쉼이 공존할 수 있도록 고안된 아홉 개의 주재원 공간들을 보며 이제껏 가지고 있던 정원에 대한 정의가 스르륵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누군가의 취향을 드러내고 과시하기 위한 정원이 아닌 생태적 질서를 바탕으로 설계된 자연스러운 정원이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얼마나 깊은 고민과 사유, 예술적인 감각이 합을 이뤄야 그 안에 들어선 사람을 가만히 안아줄 수 있는지 조용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자연의 힘과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낸 정원
베케를 소개할 때 생태정원이라는 말 만큼이나 ‘자연주의 정원’이라는 표현도 많이 쓴다. 김봉찬 정원사는 그의 저서 <베케, 일곱 계절을 품은 아홉 정원>에서 ‘자연주의정원은 사람의 관리가 점차 줄어들어도 정원의 생물 집단 스스로 잡초나 병해충 등 드러나는 외부 힘에 맞설 수 있는 방어 체계를 만들고 다양한 종들이 공생하도록 설계된 곳’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사람만을 위한 단순한 장식적인 녹지대가 아닌 수많은 자연의 생명이 공존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생태 공간, 인류가 자연속에서 다양한 생명들과 공존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정원’을 가리킨다. 그래서일까, 베케는 한국의 정원에서 흔히 보던 나무와 꽃이 아닌 새롭고 낯선 종들이 많이 관찰된다. 크고 화려한 몇몇 종이 시선을 사로잡기 보다, 다양한 개성과 특성을 가진 점,선,면의 존재들이 정원 곳곳에서 조화롭게 자리를 잡으며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지구의 모든 식물은 정원의 식물이라던 김봉찬 정원사의 말은 ‘베케’에서 더욱 잘 이해된다.
정원을 꼼꼼히 둘러보느라 시간이 그렇게 훌쩍 지났는지 모르고 있었다. 음료를 다 마시고도 한참을 기다려준 가족들의 전화를 받은 후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슬비를 맞아 더욱 진해진 색감으로 만났던 베케의 3월 정원. 계절마다 새롭게 중첩될 정원의 풍경을, 가드너가 숨겨둔 계절마다의 그림을 다시 꼭 확인하고 싶어졌다. 김봉찬 정원사의 책 제목처럼 베케의 일곱계절(초봄,봄,초여름,여름,가을,늦가을,겨울)과 아홉개의 정원을 만끽하기 위해서라도 제주에 다시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두 번째 정원 여행을 하며 느낀 점
- 하나, 내가 가꿀 땅의 특성과 기후를 아는 것이 정원 계획의 시작이구나.
- 둘, 이토록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정원에서 만날 수 있다니 신기하고 새롭다.
*글쓴이 – 이설아
작가, 글쓰기 공동체 <다정한 우주>리더, 정원이 있는 시골 민박을 준비하는 초보 가드너. 저서로는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모두의 입양>,<돌봄과 작업/공저>,<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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