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음악’, 힙합
강원도 고성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릴러말즈의 ‘Trip’을 들었다. 아내와 딸과 함께 떠나는 여행길이 더 흥겨워졌다. ‘잠깐이면 돼 잠깐이면, 잠깐이면 돼 잠깐’ 후렴구를 따라서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사실 힙합은 내게 꽤 생경한 장르의 음악이다. 별로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곡이나 뮤지션을 떠올리기도 어려운, 나에게 멀리 떨어진 ‘그들의 음악’이다.
결혼 전 클래스 곡 외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던 아내가, 나를 만나고서부터 발라드나 R&B, 재즈를 듣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한 언니들이랑 함께 피아노를 배웠던 아내에게 ‘음악은 곧 클래식’이었다. 아내에게 클래식 이외의 음악 장르는 무언가 낮은 차원의 음악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 그런 아내를 보며, 음악 장르에 대한 편견이 상대적으로 별로 없다고 생각해 온 나였는데, 김봉현 작가의 <힙합과 한국>을 읽으면서 내 안에 있던 힙합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나의 경우, 힙합 뮤지션을 ‘랩 스타로 추앙하거나 힙찔이로 경멸’할 일이 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지닌 음악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정적 멜로디를 바탕으로 감성을 잔잔하게 자극하는 음악을 주로 들어온 내게 힙합은 ‘꽤나 시끄럽고 말 많고 끌리는 멜로디가 없는’ 곡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힙합을 하거나 듣는 사람을 무시할 일도 없었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말도 있는데, 어쩌면 나는 ‘무플’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힙합’의 ‘힙’자도 모르는 내가 힙합으로 우리나라를 들여다보다.
1부 ‘한국 힙합의 발자취’를 시작으로 ’This is Hiphop', '허위의 시대 래퍼의 생존법‘을 순서대로 읽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함께 흘러온 힙합을 마주할 수 있었다. 댄스 음악 속 랩, 교포들의 등장, PC통신 언더그라운드의 장면들을 상세히 그려주는 힙합 칼럼니스트인 작가의 설명을 들으며 당시의 내가 곁눈질로 살폈던 옆 동네의 이야기를 선명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게 ’도끼‘처럼 느껴졌던 지점은, ’도덕 지향성’을 지닌 국가의 특성이 힙합과 마주할 때, 힙합이 대중에게 어떻게 읽히는지, 어떤 요구를 받는지와 관련된 설명이었다.
작가는 언론이 어떻게 힙합에 누명을 씌웠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쓴 오구라 기조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국의 도덕주의가 힙합과 힙합 뮤지션들에게 요구하는 한국인의 시선을 꼬집는다. “한국인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은 사람의 모든 언동을 도덕으로 환원하여 평가한다.” 오구라 기조의 이 문장은 비단 힙합 음악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유명인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잣대지만 유독 힙합 씬에서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래퍼의 가사와 언행에 더욱 예민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선샤인 지식노트>에서 강준만 교수는, 도덕주의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한다. “가급적 도덕주의는 피하되 도덕은 갖는 게 좋다. 그런데 어찌 된 게 우리 사회에선 도덕은 박약하고 폄하되지만 도덕주의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도덕은 자신을 향하지만 도덕주의는 남을 향하기 때문이다. 남을 단죄할 땐 도덕주의의 칼을 쓰고, 자신의 처신은 도덕을 초월하는 풍토가 만연돼 있다.”
이 지점을 명확하게 파고들어 명쾌하게 설명해 낸 김봉현 작가의 호흡을 따라가다 보니, 도덕주의를 기반한 사회적, 대중적 시선이 내 삶에도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쳐왔는지 새삼 되돌아볼 수 있었다. 힙합과 한국의 ‘충돌’을 이야기하는 그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서 우리 사회를, 우리나라를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어서 한편으론 다소 불편하기도 했지만 애써 외면하려 했던 지점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는 ‘힙합과 한국’을 여러 관점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는데, 읽는 이는 힙합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한국을 다층적으로 이해할 기회를 덤으로 얻는다.
‘힙합은 시선이자 태도이며 행동이다.’
<힙합과 한국>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고 책을 덮은 다음 내가 품게 된 문장이다. ‘킵 잇 리얼!(Keep it real!)’ 힙합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외침은 '너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하고, 거짓말하지 말고 늘 진실할 것’을 뮤지션 자신에게, 힙합을 듣는 이들에게 온몸으로 말하고 있구나 싶었다. 진솔한 자기 서사를 바탕으로 한 힙합의 랩은 흡사 글쓰기 장르에서의 에세이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써 내려갈 때 전해지는 공감과 영감을 떠올렸다.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에서 문화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정지우 작가는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글쓰기에서 최고의 지름길이란, 다른 것보다는 자신의 진실에 몰두하는 일이다. 자기 진실에 깊이 가닿은 사람은 타인의 마음 깊은 곳과 연결된다. 자신을 깊이 이해한 사람은 타인도 깊이 이해하게 된다. 자기 마음을 파내려 가서 만나는 광맥은 자기 폐쇄적인 우물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에 연결되는 지하수와 같다.” 여기서 글쓰기를 힙합으로 바꿔도 잘 읽히는구나 새삼 발견했다. 음악 장르로서 생소했던 힙합이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 특히 에세이와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어젯밤 꿈에서 랩을 했다. 힙합의 ’힙‘자도 모르는 내가 랩을 하다니. 아침에 일어나 아내와 이야기하다가 크게 웃었다. <힙합과 한국>을 읽다 보니 궁금해진 힙합 뮤지션이 생겼고, 하나하나 찾아 들으며 마음에 와닿는 곡을 만나게 됐다. 그렇게 흥얼거리다 보니 급기야 꿈에서 랩까지 하게 된 것이다. 힙합에 조예가 깊은 사람뿐만 아니라, 힙합의 문밖에 서 있는 이들에게도 새로운 시선과 관심을 열어줄 좋은 열쇠가 될 책이 아닌가 싶다. 나아가 삶의 태도와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촉진제처럼도 느껴져서, 보통의 서평이 아닌, ‘독서생활문’을 쓰게 하는 책을 만나 참 반갑다.
사회학자 노명우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삶-지식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힙합과 한국>은 이러한 면에서 자기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성숙을 자극하는 책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작가가 오랜 시간 탐구해 온 힙합처럼, 이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제기하고 저항하면서, 쉽게 일컬어지는 공감이 아닌, 영감을 주는 한 편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고 믿게 된다. 힙합을 이야기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네 삶을, 우리 사회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서평 도서 소개 <힙합과 한국>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8894482
20여 년간 음악평론가이자 힙합저널리스트로 활동해 온 김봉현 작가의 《힙합과 한국》은 50년 전 뉴욕 브롱크스에서 탄생해 1990년대 한국에 들어온 힙합이 어떻게 고유한 맥락과 색채를 지니며 지금,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지 짚어보는 책이다. 저자는 음악과 사회 전반에 대한 풍요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오해나 왜곡, 과장이나 속단 없이 한국 힙합에 대해 정확한 위치와 의미를 설명한다.
1990년대 pc통신 힙합 동호회와 클럽 마스터플랜 시대, 2000년대 새로운 실험과 랩 스타의 등장, 힙합 경연 프로의 인기, 그리고 마침내 한국 대중문화의 주인공이 된 힙합. 저자는 1990년대 초 한국 힙합의 태동기와 2000년대 본격적인 힙합 신 형성기를 거쳐 ‘쇼미더머니’와 함께 전성기를 맞았던 한국 힙합의 역사를 돌아보며, 힙합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여러 논쟁들에 대한 성찰을 풀어놓는다.
* 본 뉴스레터는 한겨례출판의 협찬으로 제작되었으며, 필자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섬세하게 읽고 진정성 있게 추천하는 글입니다.
* 글쓴이
인생여행자 정연
이십 년 가까이 자동차회사에서 HR 매니저로 일해오면서 조직과 사람, 일과 문화, 성과와 성장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몸으로 답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지층처럼 쌓아두었던 고민의 시간을 글로 담아, H그룹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칼럼을 쓰기도 했다. 9년차 요가수련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을 인생여행자라고 부르며, 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는다. 현재는 H그룹 미래경영연구센터에서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다.
작가의 브런치 https://brunch.co.kr/@promi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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