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을 생각해보자. 죄 없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옷이 다 벗겨진 채 어떤 방으로 줄줄이 끌려간다. 방의 불이 꺼지고, 가스가 새어나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비명을 지른다. 방금까지만 해도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 스승, 또는 아들딸이었을 그 사람들은 그 순간엔 그냥, 함께 죽어가는 피해자가 될 뿐이다. 방금 들린 비명이 누구의 아우성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아비규환의 덩어리만이 남는다. 그렇게 죽는다. 어떤 이와 관계를 맺었는지, 어떤 이를 사랑했는지, 무엇에 열정을 품었는지가 다 소용이 없어진 채로, 그냥 덩어리가 되어 다 같이 숨을 거둔다.
그러나 이렇게 자세히 서술해도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한 일이 아니라서 그렇다. 물론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러한 참혹한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고, 나아가야할 길을 모색할 수는 있겠지만, 이 일을 당한 자의 가족들이 느꼈을 감정의 골에 비하면 당사자성 없는 슬픔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언젠간 침묵해야할 순간이 온다. 그러나 참사 앞에서 침묵은 비겁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깊이를 느껴야만 한다.
이쯤에서 폴란드 작곡가 헨릭 고레츠키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를 소개하려 한다. 세계 2차 대전 중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영혼을 위해 작곡한 이 곡은 세 개의 악장이 모두 느리고, 질질 끌며, 비통하다. 1,2,3악장 모두 소프라노가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데, 가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편의를 위해 번역된 채로 올린다.)
1악장의 가사
나의 아들, 사랑받는 아이야
너의 상처를 이 어미에게 나누어주렴
사랑하는 아들아, 내 언제나 너를 가슴에 품고 있노니
말을 해 보려무나 이 어미가 기뻐하도록
또 언제나 성심으로 너를 섬기노니
너는 이미 나를 떠나고 있지만, 내 가슴에 품은 희망이여!
2악장의 가사
어머니, 울지 말아요
천상의 여왕께서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실 거예요
3악장의 가사
어디로 가버렸느냐, 사랑하는 아들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잔인한 적들이 죽였겠지.
아, 이 사악한 인간아,
내게 말해다오, 내 아들은 어디에 있느냐?
(...)
가사를 보면 알겠지만, 이 곡은 죽은 아들에게 부르는 어머니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상황을 묘사한다거나,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설명하는 가사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어머니가 느낄 ‘슬픔’에만 집중한다. 곡의 분위기도 그렇다. 울렁울렁 움직이는 덩어리의 화성만 들린다. 모티브를 엮어 서사를 부여해, 몰아쳐서 터트리는 게 일반적인 작곡 기법인데, 그런 테크닉을 싹 빼버리고 울림만 남긴다. 작곡가가 인터뷰에서 이 곡이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사람들을 위해 작곡되었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작품 내에서 상황묘사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작곡 배경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며칠간 제대로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늪에 빠졌다. 나치정권의 만행을 다룬 영화, 음악, 회화는 많지만, 이 작품만큼 구역질나는 슬픔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건 없었다. 왤까, 왜지? 가사에 참혹한 묘사도 하나 없고, 제목 또한 추상적인 감정을 다룰 뿐인데, 왜 이것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란 무엇인지를 피부로 와 닿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 답을 작곡가의 인터뷰에서 찾아냈다.
“사람 사이에는 항상 슬픔의 강이 흐르고 있어요. 예술가란 그 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죠. 살아있는 것은 축복이자 형벌이에요. 그 형벌을 견뎌야 해요.”
“슬픔의 강을 건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배를 타고 건너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강물과 하나가 되어 휩쓸려 내려가는 것이죠.”
참혹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사실상 ‘관조’다. 타자가 되어 보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고레츠키의 말을 빌리자면 ‘배를 타고 건너는 방법’이다. 그러나 상황을 제거하고 감정만을 다루게 되면, 그것은 몰입이다. 슬프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았거나,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두려워 한 적이 있다. 아우슈비츠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다루면, 그것이 내 일이 아닌 이상 내 상황에 대입한다고 해서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가-심지어는 내 상황에 대입하는 것조차 비윤리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어렵지만, ‘슬픔’만을 다루게 되면 당연히 우리는 내가 겪은 ‘슬픔’에서 출발할 수 있게 된다. 3악장의 ‘내 아들은 어디에 있느냐?’라는 가사를 듣는다면, 아들을 잃어본 사람은 그때의 슬픔을, 부모를 잃은 사람은 또 그때의 슬픔을 떠올리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다 보면 확장할 수 있다. 저들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의 꿈은 그들의 꿈이고, 나의 슬픔은 그들의 슬픔이다. 내가 원하는 세상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세상일 테고, 그들의 사랑이 좌절된 것은 내 세계의 붕괴다. 그러므로, 그들의 고통은 곧 나의 것이다. 이것을 느끼게 되면, 드디어 참사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함께 싸울 수 있는 ‘당사자성’을 가지게 된다.
어쩌면 슬픔의 강과 하나가 되는 것만이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그 아픔을 견뎌낼 유일한 방법일 수 있겠다.
그러므로 나는 기꺼이 휩쓸려 내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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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셋째주 화요일 -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이야기 '
글쓴이 - 영원
음악 공부를 하고있는 대학생입니다. 이유있는 예술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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