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은 계속 비가 왔다. 밀폐용 필름 너머로 굵은 빗줄기가 보였다. 답답함에 겉문만 반쯤 열어뒀던 창도 그때만큼은 완전히 닫아두었다. 우산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흐린 하늘, 새벽녘에는 천둥소리에 잠이 깬 적도 있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강렬한 빛이 병실로 쏟아졌다. 그럴 때면 내가 어디에 누워있는 건지 헷갈리고는 했다. 여기는 어딜까. 모르긴 해도 내가 닿아야할 곳은 아닐 거라고. 잠결에 그렇게 생각했다.
아침 약을 먹으러 일어나니 비는 그쳐있었다. 세상이 떠나갈 듯 흔들리던 창가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로운 햇살이 비쳐 들었다. 그 차이가 너무 극적이었다. 내가 잠든 사이 병실 전체가 아주 먼 곳으로 이동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마치 비행기를 탄 것처럼 말이다. 착각 때문인지 정말로 멀미가 난 듯 어지러워 나는 다시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도 멀미를 했던 것 같다. 떠올리기 시작하니 기억이 생생했다. 열일곱 살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1학년 성적 우수자를 선발해 일본 연수를 보내주는 혜택이 있었다. 나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독서 활동 등 다른 가산점이 붙어 운 좋게 마지막 순번에 끼게 됐다.
태어나 처음 가보는 해외여행이었다. 나는 꽤나 들떴음에도, 이왕 만드는 여권을 10년짜리로 만들라는 부모님의 말은 미심쩍게 들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곧장 직장에 다닐 텐데, 10년 안에 해외에 다시 나갈 여유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고민이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의 상상력은 경험을 벗어나지 못했다. 손에 닿는 것들로만 원을 그렸고, 지름 밖은 깜깜하기만 했다.
나의 경험이 닿지 못한 곳은 해외뿐만 아니라 또 있었는데, 바로 하늘이었다. 제주도도 가본 적 없는 나였다. 물론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비행에 성공한지 100년도 넘게 지난 지금,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울 게 없었다. 더 어렸던 시절에도 맑은 날 고개를 들면 긴 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금방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비행은 일본 연수만큼이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나는 연수 장소였던 오사카의 유명 관광지보다 하늘 위에서 듣고 싶은 음악을 더 열심히 찾아보았다. 지평선을 가르며 날아가는 비행기, 눈앞으로 스쳐갈 구름의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출국 전날에는 어린아이 마냥 잠이 오지 않아 몇 번이나 캐리어를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밤을 꼬박 새고 김해 공항으로 향했던 나는 어이없게도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잠이 들고 말았다. 착륙의 충격으로 눈을 떠서는 정말 당황했다. 긴 활주로는 처음에는 출발했던 곳과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게이트로 다가갈수록 낯선 언어로 된 풍경이 하나둘 창밖을 채웠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언제 경계를 넘어온 걸까. 잠들지 않았던 옆자리 친구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
웅- 대답대신 폭염을 알리는 재난 문자가 왔다. 정신이 들었다. 나는 혼자 있었고, 이곳은 비행기가 아니었다. 밀폐된 병실은 덥지 않았지만 나는 괜히 평소에 틀지 않던 에어컨을 켰다. 기침이 많이 가라앉아서였다. 며칠 전 상태를 확인한 의사도 예정대로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병실에 있는 동안은 모든 게 단순했다. 환자복을 입고 링거를 꼽고 있으면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남에게 설명할 필요도, 스스로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밖에서는 어떨까. 이곳을 나가면 훨씬 복잡한 ‘나’를 마주해야 할 터였다. 여전히 폐에는 염증이 있고, 6개월에서 1년까지 복용 중인 약을 똑같이 먹어도. 겉으로는 전혀 아픈 티가 나지 않을 테니까. 나 역시 침대에서 치료에만 전념하지 않고 다시 일을 하고 생활을 해야 할 테니까. 단순한 구분으로는 그 모든 ‘나’를 설명해낼 수 없었다. 알맞은 경계를 찾아보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일본에서 돌아오던 날도 그랬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비행의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며 차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비행기는 점점 속도를 내고, 마침내 활주로를 벗어나 육중한 기체를 하늘로 들어올렸다. 논과 밭이 바둑판처럼 보이더니 점차 큰 도로와 도시가 콘크리트로 찍어낸 점묘화(點描畵)처럼 보였다. 기대했던 만큼 한껏 만족스러운 전경이었다.
그런데 비행이 계속될수록, 나는 만족감 한편에 다른 감정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물리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은유적으로 ‘몸이 붕 뜨는’ 기분. 이유를 알 수 없던 나는 비행기 차창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가 멀어지고, 육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이 지나 보이는 건 구름밖에 없고, 그 너머로 망망한 바다가 펼쳐질 때가 돼서야 알았다. 나는 경계를 찾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던 것처럼 전과 후가, 안과 밖이, 우리와 외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경계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습관처럼 당연하게 눈에 보이는 ‘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조차 잘못 섞인 물감마냥 모호한 색으로 번져 있었다.
그때 나는 예감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에는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릴 테지만, 분명 눈치 채고 있었다. 비행이 나에게 왜 중요한지. 이렇게 크고 무거운 물체가, 수백 명의 사람을 한 번에 태우고, 몇 시간이나 엄청난 속도로 상공을 가르는 사건이, 목적에 따라 그저 구겨지듯 축약될 수 있다는 걸. 그 가운데 부스러기처럼 버려지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걸.
하늘을 날고 싶다는 어느 형제의 꿈이 100년이 지나 과학이 되고, 돈만 있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상품이 된 지금도, 어떤 이야기는 떠오르지 못한 채 저 망망한 자리에 남겨질 것이다. 툭 잘라낸 듯 깔끔하고 깨끗한 게이트에 가려 처음부터 없던 것으로 취급당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멀미가 난 듯 어지러웠다.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억지로 고개를 들자 경계가 보였다. 비행기가 아닌 병실이, 하늘이 아닌 육지의 풍경이, 하지만 똑같이 굳게 닫힌 창문이 보였다. 햇살은 그 구분을 비웃듯 밖에서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여름이 내게 물었다. 너는 어디로 가고 싶냐고. 그 질문은 이곳을 병실이 아닌 전혀 다른 무언가로 바꾸어 놓았다. 창밖으로 변해가는 세계가, 열일곱 비행에 두고 온 감정이 한 번에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어쩌면 그건 짧은 환상이나 여름날의 착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예감했다. 여기가 내가 닿아야 할 곳이라고. 전과 후가, 안과 밖이, 우리와 외부로 설명할 수 없는 곳에 내가 있어야만 했다고. 그럴 이유가 있었다고. 나는 손으로 작은 원을 그려보았다. 지름 밖 세상은 하나도 깜깜하지 않았다.
'아픔에 이름이 생겼다'
결핵 환자로 지냈던 경험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에세이입니다. 단순한 치료 과정보다는 ‘환자’라는 정체성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자신의 아픔을 말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허태준
직업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생을 거쳐, 산업기능요원으로 지역 중소기업에서 근무했다. 당시의 경험으로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를 썼다. 회사를 그만둔 후 모든 삶은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우리 사회의 이름 없는 시절에 대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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