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여행자의 교토 답사기

고베 공방에서 반지까지 만들게 된 썰_교토 답사기

한수희 작가의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이 쏘아올린 작은 공

2023.11.13 | 조회 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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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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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은반지를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두께가 얇지만 뭔가 투박하게 보이면서도 세련돼 보이는 이 반지는 내가 직접 두들겨서 만들었다. 그것도 일본 고베의 어느 작은 반지 공방에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엄밀하게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일본 교토였다. 오랜 역사를 지닌 신사가 가득한 동네라서 우리나라 어디랑 비슷하다고 하면 좋을까 싶을 때 경주를 떠올리게 되는 도시다. ‘한국인의 사랑을 받는 도시’라는 증거가 도시 곳곳의 한글 병기된 입간판으로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수사, 금각사, 은각사 등을 녹색 창에 검색하면 관련된 블로그 글이 쏟아진다. 한국인 여행 유튜버들의 여행 영상 몇 편만 봐도 이미 교토를 다녀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서울 집에 앉아서도 교토의 면면을 알기란 참 쉬운 일이었다.

고백하건대 이번 교토 여행에서 위에 언급한 장소들을 한 곳도 가지 않았다. 특별히 가지 않으리라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교토를 소개하는 여행 책자를 넘겨보다가 사진 한 장에 마음이 가닿았고, 그 사진에 홀리듯 교토 외곽의 아라시야마라는 동네에 숙소를 잡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내 마음이 머무는 곳에 몸도 함께 머물면 되지.’ 어느 시의 한 문장 같은 말을 마음에 품고 시골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그러다 보니 유명한 신사로 가득한 교토 중심부는 왠지 서울 강남처럼 느껴졌다.

교토 아라시야마 치쿠린
교토 아라시야마 치쿠린

교토 외곽에 위치한 아라시야마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이긴 했다. 여행 블로그를 보다 보면, 3박4일 교토 관광을 한다고 했을 때 반나절 정도로 휘리릭 돌아보고 사진 찍는 정도의 스팟로 분류되곤 했다. 교토의 ‘응 커피’로 알려진 커피 전문점 앞은 긴 줄의 사람들로 북적였고, 실제로 이른 아침부터 저녁 다섯 시 정도까지 아라시야마의 메인 도로에는 행렬을 이루며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파도를 이루며 흘러 다녔다.

인파가 흘러들어오기 전, 그리고 흘러 나간 후, 아라시야마는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고요한 일본의 시골이라고 해야 할까? 동네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책하거나 가볍게 스트레칭하거나 가츠라 강을 바라보며 함께 길을 나선 지인과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 아라시야마가 좋았다.

새벽녘 가츠라 강가
새벽녘 가츠라 강가

아라시야마에 머물던 삼 일 동안 매일 치쿠란 대나무숲을 거닐었다. 이른 새벽, 한낮, 늦은 오후, 서로 다른 시간에 같은 곳을 걷다 보니 같은 곳인데도 참 다르고 매번 새롭게 느껴졌다. 대나무숲을 빠져나와서 주변을 걸을 때도 매일 다른 루트로 걸어봤다. 구글맵에 의지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이끌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기분이 좋았다. 시골 동네에 있을 법한 자그마한 집부터 밖에서 보기에도 으리으리한 저택까지, 작은 오솔길에서부터 기찻길을 가로지르는 철도횡단보도까지 이리저리 걷다 보니 내 삶도 그만큼 풍요로워지는 것만 같았다.

치쿠린 근처의 기찻길
치쿠린 근처의 기찻길

‘단절과 고독’, 이 단어들을 직접 떠올리진 않았지만, 시골 대나무숲을 걸으며 멍때리기 하고 싶은 나의 마음은 몸과 마음이 분주한 삶과 일상에서 ‘자발적 단절’을 꿈꾸며 시작된 것 같았다. 대나무숲을 거닐고 가츠라 강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다가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비행기 타고 일본까지 왔나?’라며 자책의 목소리가 내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담양에 가도 대나무숲은 볼 수 있고, ‘강이면 한강이지!’ 한강 보며 멍때리기 할 수도 있을 텐데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여기까지 왔냐고 스스로 여러 번 되묻기도 했다. 난 왜 이곳 아라시야마에 와야만 했을까?

먼저, 완전한 단절이 필요했다. 다른 공간으로 넘어왔을 때 비로소 완전히 확보되는 물리적인 단절이 절실했다. 누군가가 나를 직접 구속하고 있는 건 아니었는데, 업무와 일상, 많은 만남에서 벗어나, 심리적으로 오롯이 홀로 있다고 느끼기 위한 첫걸음이 필요했다. 누구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특별한 계획 없이 어슬렁거리며 누리는 자유로움은 내가 바라던 게 분명했다. ‘그래, 내가 원하던 건 이거였어!’ 마음속에서 웅장한 외침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나의 마음은 참 요상한 것이어서, 고독을 쟁취하기 위한 여행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희구했다. 길을 걷다가 만난 일본인 대학원생들과 같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호스텔에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과 말을 섞으며 여행지에서의 하루와 서로 자기 나라와 도시의 특징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채우기도 했다. 돌이켜 떠올려 보면 뭔가 대단한 이야기들을 한 건 아니었는데, 그 대화의 시간이 소중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자리인 것 같기도 했다.

교토 아라시야마에서 만난 친구들 :)
교토 아라시야마에서 만난 친구들 :)

호스텔 바로 옆에 이자카야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매일 저녁에 그곳에 갔다. 마치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의 음식점 같은 분위기의 그 이자카야가 좋았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늘 같은 모둠 사시미를 주문하고 사케 도쿠리 한 병을 주문해서 홀짝이다 보면 마치 그곳에 살고 있는 동네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매일 저녁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하루는 인도네시아에서 출장 온 쾌활한 삼십 대와 자신이 하는 안경 사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고, 하루는 중국 상하이에서 온 사십대에 막 들어선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상하이에서 온 그와 중국과 한국, 일본에 대한 이야기, 교토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는데, 대화 말미에 고베를 한번 가보라는 그의 추천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 한번 가볼까?’

다음 날 아침 일찍 짐을 싸서 고베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출근 시간대에 운행하는 급행 전차를 탔는데, 출근하는 이들로 가득한 열차를 환승까지 해가며 전차를 타고 가는 내가 마치 일터에 출근하는 듯한 강렬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어딘가 무뚝뚝한 표정들에, 저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자기만의 공간으로 들어가 있는 뭔가 숨 막히는 출근길 모습이 내가 서울에 두고 온 나의 출근길과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만난 책 읽는 어떤 이의 옆모습이 왠지 내게 큰 위안을 주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 아주 각박해 보여도 여기도 삶이 있고, 꿋꿋이 헤쳐 나갈 힘을 갖고 있어.’라고 조용히 외치는 것만 같았다.

고베행 급행열차 안에서 만난 풍경
고베행 급행열차 안에서 만난 풍경

그렇게 도착한 고베는 말 그대로 이국의 낯선 도시였다. 애초에 여행 계획에 없던 곳을 왔으니, 이곳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연관검색어로 ‘고베 대지진’만 맴돌았다. 갑자기 그곳이 더 낯설고 약간은 무섭기까지 했다. 낯섦과 무지는 때로 공포로 이어질 수 있구나 싶었다. 그래도 이렇게 왔는데 둘러는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우연히 발견한 시티 루프 버스(도시 순환버스)에 올라탔다. 운전기사 외에 ‘차장’이라고 불릴만한 여승무원이 눈에 띄었다. 정거장마다 또렷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장소를 안내했다. 자기 일을 충실히 해내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장인정신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AI시대의 일자리 창출의 일환이 아닐까?’ 같은 우스운 생각까지 떠올랐다.

고베 시티 루프 버스(도시 순환버스)
고베 시티 루프 버스(도시 순환버스)

그렇게 고베를 한 바퀴 돌아서 처음 버스에 올랐던 정류장에 다시 돌아왔다. 이제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일본식 카페에서 커피 한잔해야겠다 싶었다. 내 취향은 미국식 커피라서 눈앞에 보이는 스타벅스에 마음을 흘러 들어갔지만 이내 주워 담아 1949년에 만들어진 일본식 커피집에 들어섰다. 일본 현지인과 여행객들이 섞여 있는 그곳은 마치 개화기 경성의 여느 다방처럼 보였다. 쓴 커피 한 모금을 목구멍 너머로 넘기는데 이내 스타벅스 카페라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카페에서 우연히 발견한 팸플릿에 이끌려, 쓴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고 반지 공방을 향하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으로 연락했더니 반지 공방 직원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꽤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해 오는 직원을 대하다 보니 여기가 고베인지, 성수동인지, 연남동인지 순간 헷갈렸다. 그럼에도 낯선 땅 고베에서 우리말로 반지 만드는 법 설명을 듣는 경험 자체가 신기하고 재밌었다. 친절한 설명에 이끌려 작은 반지를 망치로 고르게 두들겨서 내 손가락 치수에 맞게 키워가는 손맛이 유독 좋았다. 무엇을 직접 가공한다는 게 이런 뿌듯한 느낌일까? 새삼 생각해 보기도 했다. 어느덧 반지가 완성됐다. 왼쪽 약지에 끼워보니 참 잘 맞았다.

고베 반지 공방 멤버들과 기념 촬영 :)
고베 반지 공방 멤버들과 기념 촬영 :)

단절을 꿈꾸며 떠난 여행에서, 나 자신도 만나고 열 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고독을 곱씹고 싶었는데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 홀로이고 싶은데,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함께 드는 건, 마치 자유로워지고 싶으나 구속되고 싶고, 구속되고 싶으나 자유롭고 싶은 마음과 비슷했다. 어쩌면 교토로 떠난 여행은 나 자신에게로 떠난 여행이기도 했고, 타인을 향한 나의 시선과 마음을 되돌아보는 여행이기도 했다. 마치 책을 읽을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여정 같았다. 교토 아라시야마를 거쳐 고베까지 이른 이번 여행이 한수희 작가의 책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에서 시작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수학여행 온 아이들 @교토 아라시야마 가츠라 강가
수학여행 온 아이들 @교토 아라시야마 가츠라 강가

 

* 글쓴이

인생여행자 정연

이십 년 가까이 자동차회사에서 HR 매니저로 일해오면서 조직과 사람, 일과 문화, 성과와 성장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몸으로 답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지층처럼 쌓아두었던 고민의 시간을 글로 담아, H그룹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칼럼을 쓰기도 했다. 9년차 요가수련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을 인생여행자라고 부르며, 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는다. 현재는 H그룹 미래경영연구센터에서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다.

인생여행자 정연, 19년차 HR 매니저, 9년차 요가수련자, 14년차 아빠로 살아갑니다.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습니다.
인생여행자 정연, 19년차 HR 매니저, 9년차 요가수련자, 14년차 아빠로 살아갑니다.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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