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하여_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이야기_영원

영화 피닉스, 그리고 Speak Low

2023.10.03 | 조회 1.48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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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올해 상반기에, 나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놓아주어야 했다. 아무에게도 내 속마음을 말하지 않고 끙끙 앓다가, 오래 알고 지낸 후배에게 이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누나, 모두가 무고한 사건이다. 아무도 잘못한 게 없는데, 천재지변 같은 거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그래, 늦었지. 늦었지. 어쩔 수 없지. 이제 나도 놓아주어야지.]

말은 참 쉽게 했지만, 문드러져 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야할 걸 알면서도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엔 온몸이 무거웠다. 과거를 놓아주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마음이 찢어지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있게 한 건 과거의 인연 덕분이니, 과거를 놓아준다는 건, 나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으니까 말이다. 

(**아래의 내용에는 영화 <피닉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 <피닉스>에서, 주인공 넬리 또한 같은 이유로 과거를 놓지 못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얼굴에 총격을 맞고, 살아 돌아와 성형수술을 한 넬리는 수용소에 체포되기 전 ‘원래 자기 자신’을 찾고 싶어 한다. 얼굴도, 성격도 이전의 자신과 완전히 딴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넬리는 남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다시 만난 남편은 넬리가 죽었다고 믿고, 넬리의 유산을 얻기 위해 진짜 넬리에게 자신의 ‘부인행세’를 해 달라 부탁한다. 넬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이 진짜 넬리인 것을 숨기고, 남편의 연극에 동참한다. 

“그와 함께하니까 예전의 넬리가 된 것만 같아.”

넬리는 점점 웃음을 찾아갔다. 자신이 진짜 넬리인줄 꿈에도 모르는 남편에게, 넬리와의 추억을 물어보고, 그와 온종일 함께하면서, 예전의 삶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남편이 넬리를 배신한 게 아니라 믿고, 그와의 일상을 즐긴다. 그러나 넬리 행세를 하면 할수록, 남편이 자신을 배신한 것은 서서히 드러났고, 결국 넬리는 자신이 수용소에 끌려가자마자 남편이 이혼서류를 준비했다는 사실마저 알게 된다. 넬리는 남편과 자신의 지인을 만나는 날에, 모든 사람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른다. 

Speak low when you speak love Our summer day withers away too soon, too soon Speak low when you speak love Our moment is swift Like ships adrift We're swept apart, too soon Speak low Darling, speak low Love is a spark lost in the dark too soon, too soon

넬리의 남편은 피아니스트였고, 그녀는 가수였다. 그들은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함께 노래하곤 했다. 그 날도 친구들 앞에서 넬리는 남편에게 반주를 시켰다. 남편은 넬리의 노래에 맞추어 반주를 하다가, 넬리의 손목에 있는 아우슈비츠 죄수번호 낙인을 목격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가 노래 부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We're late, darling, we're late”

Weil : Speak Low 가사 중

넬리는 노래를 부른 후, 외투를 챙겨서 밖으로 나선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영화에서는 남편이 넬리를 배신한 걸로 나오지만, 내가 보기엔 이 중에 잘못한 사람은 없다. 나치시절에,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면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해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했다 해서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남편은 무고하다. 그러나 남편이 넬리를 배신했던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미 늦은 것뿐이다. 서로를 놓아줄 일만 남았다. 

우리는 미래를 모른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 헤어지게 될지 아는 사람은 없다. 일이 벌어지면, 놓아주어야한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함께하기엔 이미 늦은 사이가 되곤 한다. 넬리가 남편을 떠나 어떻게 살지 또한 아무도 모른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을 찾을 수도 있고, 상처가 깊어 내면의 동굴 속에 숨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넬리는 앞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남편과 친구들이 있는 집에서 “We’re Late”라는 가사를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갔다. 어쩌면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을 때엔, 늦은 걸 인지했을 때엔,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 일수도 있지 않을까. 

빨간드레스의 넬리가 부르는 <Speak Low>, 그녀가 진짜 넬리임을 깨닫던 남편의 슬픈 눈, 그리고 유유히 밖으로 나아가는 넬리의 뒷모습.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과거를 놓아주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러나 나를 붙잡는 과거가 마지막까지 너무도 찬란해서, 앤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We're late, darling, we're late. The curtain descends. 

Everything ends too soon, too soon

우린 늦었어, 내 사랑, 우리는 늦었어요. 

커튼이 내리고, 모든 것들은 너무도 빨리 끝나죠. 너무도 빨리.

*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이야기 '

글쓴이 - 영원 

음악 공부를 하고있는 대학생입니다. 이유있는 예술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브런치 https://brunch.co.kr/@d8aec389643a40f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channel/UC-78Z2dXevYPh4j0BMAh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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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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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뭉구

    0
    about 1 year 전

    누군가는 배신을 하고, 누군가는 용서를 했네요. (용서 혹은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라 판단하고 그냥 놓아줬다고 생각해야겠지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였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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