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집짓기 본능이 있다. "나는 아닌데? 건축에 대한 관심도, 감각은 일도 없는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 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까운 동물을 생각해보라. 개미나 새는 자연재료를 가지고 자신들의 집을 짓고, 직접 집을 짓지 않는 동물들도 자신들이 피할 동굴을 찾거나 땅굴을 파고, 하다못해 인간들이 버린 부산물에 자신들의 은신처를 마련한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은신처에 대한 기본적인 구축과 공간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지구 상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건축 구축 술을 가진 동물이다. 인간은 자신의 은신처를 상상하고, 그려보고, 써보고, 이야기를 만들 줄 안다. 이처럼 '인간의 집짓기'에는 물리적 공간의 구축 외에 자신의 욕망과 꿈이 투영된다. 인간의 집 짓기는 상상에서 시작된다. 과거를 잘 돌아보면 내 집 짓기에 대한 상상은 적어도 한 두 번씩은 해봤으리라.
마당의 우산집
기억나는 나의 첫 집 짓기는 4살부터 12살 이전에 살았던 개량 한옥의 <마당의 우산집>이다. 나는 비가 오면 집에 있는 모든 우산을 꺼내어 다 펼쳐서 마당 한가운데 우산집을 만들었다. 요즘식으로 보면 둥그런 텐트 형식이다. 비가 오면 등장한 그 임시 놀이터, 그 안에서 나만의 공간의 특별함을 느꼈고, 우산에 부딪히고 타고 내리는 빗소리에 청각을 깨우는 공간을 알게 되었고, 우산들이 겹쳐 만들어준 작은 공간에 안락함을 느꼈다. 우산집이 완성되면 늘 우산과 우산 사이에 빈 공간으로 손을 빼꼼히 내밀어 그곳으로 엄마를 들어오라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물론 어른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어른이 들어오는 순간 그 우산집은 바로 붕괴될 크기였으니깐. 내 마음은 비가 오지 않는 때에도 우산집이 그대로 존치되길 바랐지만 엄마는 그 마당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으니 당연히 비가 그치면 그 우산들은 접혀 툇마루 밑으로 줄줄이 들어갔다. 비가 오면 그 마당에 널려있던 일상의 물건들은 비가 안 맞는 한옥 처마 밑으로 옮겨지고 나의 우산 집 짓기는 다시금 시작되었다. 비가 오면 나타나는 나의 집이었다.
집안에서 내맘에 드는 공간 찾아다니기
그다음 나의 상상의 집짓기는 13세부터 23세까지 지냈던 2층 양옥집 <집안 내의 공간이동>이다. 그 양옥집은 대지 크기 대비 건물이 무척 큰 집이었다. 내 마음에는 안 들었었다. 나의 상상 속의 좋은 집은 집보다는 정원이 넓은 집이었다. 대신 집이 커서 용도별로 쓸 수 있는 방들은 많았고, 방들의 크기도 크고 보통 집에서 보기 힘든 층고가 높은 집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집이 무서웠다. 그 경험으로 건축가가 된 후 주택을 설계할 때 침실방 높이만큼은 너무 높지 않게, 크기도 너무 크지 않게 계획한다.
그 집은 우리 부모님께서 직접 지으신 집은 아니었다. 가족의 기호나 꿈이 실현이 예초에 발현된 집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개량 한옥에 살다가 아빠의 사회적 성공을 타고, 자식들에게 넓은 공간과 방 하나씩 해주고 싶은 맘에 찾으신 집이다. 오래된 절대 잘생기지 않은 크기만 한 2층 평슬라브 양옥집이었다. 그럼에도 처음 가진 작은 정원은 작은 수동 잔디 깎는 기계를 들여야 할 초록 잔디가 깔렸고, 봄가을로 정성스레 해충 방역을 하는 소나무, 향나무와 낮은 관목과 꽃나무가 어우러진 예쁜 정원으로 변모해 갔다.
그 집에서 나의 욕망이 늘 꽂히는 곳이 하나 있었는데, 거실 외에 있던 별도의 응접실이라는 곳이었다. 현관에서 들어서면서 정원과의 사이에 자리한 응접실은 우리 집에서 가장 좋은 곳에 있었다. 직각으로 만나는 큰 창으로 우리 집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원이 보였고, 사시사철 변화하는 꽃과 나무가 그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한국사람들이 부르짖는 남향과 동향으로 열린 곳이었다. 그곳에는 단아한 조각이 새겨져 있던 중국 화류라는 나무로 만든 의자 세트와 피아노 그리고 엄마가 연중행사로 하시던, 크리스털을 한 알 한 알을 내려 세척하고 다시 꽂던 샹들리에가 천장에 달려 있었다. 내부 전체가 나무 마감으로 되어있고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 법한 화려한 무늬의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마음충만을 주는 자부심의 공간의 의미
그런 곳이 내가 피아노 연습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가족들이 생활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아빠가 손님을 맞이하는 곳으로 보통은 비어있었다. 바로 옆에 미닫이 중문으로 아빠의 서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뿐 주택에서 있을 법한 주된 활동이 있던 곳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그것이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집에서 가장 좋은 공간인데 가족이 쓰는 시간이 별로 없다니, 물론 늘 비어진 덕분에 내가 다양한 상상을 하며 혼자 놀 수 있었던 곳이기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은 나의 엄마, 아빠에게는 '자부심의 공간'이었던 듯하다. 집에서 가장 좋은 장소에 아름답게 꾸며놓고, 인생의 성공의 결과를 보여주는 곳,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충만되는 곳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에 나의 방을 옮기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급기야 대학을 들어가 20대에 들어서던 때 내방을 그쪽으로 용감하게도 옮겨달라고 요청했으나 엄마, 아빠의 황당한 표정과 함께 단칼에 거절을 당했다. 자신들의 자부심의 공간에 딸이라도 혼자 쓰는 공간으로 대체하긴 어려웠던 것이다. 비워 놓을지언정, 사실 비워 놓으신 것은 아니었다. 마음 가득 충만이 있던 곳이니.
나의 라일락 나무
나는 그 이전에도 그 집에 사는 동안 2층의 방 두 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방을 옮기고, 가구 배치를 바꾸면서 나의 공간으로 꾸미곤 했었다. 그때 밖의 창으로 무엇이 보이는 가는 내게 무척 중요한 요소였다. 여기가 내게 좋은지, 저기가 내게 좋은지 가늠을 해보는 실험이 이어졌고, 결국 엄마한테 욕먹을 만큼 왔다 갔다를 반복하다 한 곳으로 최종 정착을 했다. 그곳은 길 건너 앞 주택의 네모반듯한 정원이 시원스레 보이고, 동쪽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고, 남쪽의 창 앞으로 1층과 2층의 면적 차로 생긴 2층 거실 앞 넓은 베란다가 맞닿아 있었다. 가장 좋았던 것은 1층 정원에서 자라 올라온 라일락 나무가 그방 창가에서 손끝에 달듯 보이는 곳이었다. 사실 베란다에 나가면 그 라일락의 꽃도 이파리도 만질 수도 있었다. 라일락이 피는 시절이면 그 방에서 제일 먼저 라일락 꽃이 핀 것을 알았고, 방한 가득 라일락 향을 머금는 방이었다. 그 라일락은 내가 자라듯 같이 커가는 나의 나무였다. 그렇게 나만의 방이 되어가던 그곳은 전국적으로 병충해가 너무 심하던 어느 해 라일락 나무도 여지없이 피해갈 수 없었다. 해충 소독을 하러 온 아저씨들은 벌레가 파먹은 것 같다며 잘라야 한다고 하였다. 놀라서 자르지 못하게 하는 나를 가뿐히 제치고 위 가지부터 잘라 나가다 밑동에서 1m 정도까지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나무속 구멍은 더 커졌고, 뻥 뚫려 있었고 그 안에서 해충약을 뿌리자 수백 마리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를 쏟아내었다. 그 모습에 내가 얼마나 울었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할 수 없이 뿌리 직전까지 잘라야 했고, 그렇게 나의 라일락 나무는 사라졌다. 그 방은 더 이상 라일락 향기를 머금지 못했다.
내집짓기는 공간의 인식의 주체에 명확히 자신이 있다.
자신의 과거에 이처럼 내 집 짓기는 상상이던, 놀이이던, 누구에게라도 있을 법한 이야기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산 집이 뭐 집 짓기야?" " 방 옮기는 것이 왜 집 짓기야?"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공간의 인식의 주체에 명확히 자신이 있다. 나의 삶에 맞춰진 욕망을 투영하는 공간의 이야기가 있다. 거기에서 외부공간과의 교감이 있다. 그 공간에 나만이 발견하고 애착하는 그 무엇이 있다. 집 짓기는 그런 내 취향과 욕망을 담는 일이다.
자, 그럼 당신의 상상의 집짓기는 어떠했나요? 자신안에 잠자고 있던 집짓기 본능을 깨워 볼까요?
다음회, "나는 어떤 집을 짓고 싶은가?"
*<내집짓기는 처음이라> 매달 7일 , 건축가가 전하는 진짜 집짓기 이야기
*지은이 : 전이서,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이자 교육자이다. 건축을 보는 눈에 포착된 일상을 전하고자 글을 가끔, 때때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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