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는 아이들

누구나 품어주는 산_산을 오르는 아이들_윤경

01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2024.01.31 | 조회 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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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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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페 가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아이가 한 명, 두 명 생기고 카페보다는 산을 찾게 되었다. 언젠가 집 앞에 있던 멀쩡한 카페에도 '노키즈존'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걸 보고 발길을 돌리게 되자, 내가 그저 일반 손님이 아니라 어느새 타인에게 폐를 끼칠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다는 걸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아이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싱글일 때는 몰랐다. 공공장소에서까지 배제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부모가 되고 차별과 혐오의 시대를 몸소 실감하게 되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노키즈존'이라는 말이 아직도 내게는 당혹스럽다.

 

그렇다고 왠지 아이들 위주의 장소를 찾아다니는 부모가 되진 못했다. 돌아보니 여태껏 키즈카페나 놀이동산 한번 가지 않았다. 아이들이 노상 노는 일을 바깥에서 돈 주고 소비하면서까지 그 인위적인 즐거움을 얻어야 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특화된 정해진 놀이를 즐기는 그런 특정 장소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누리는 일상적인 장소에서도 아이가 온전히 자신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시간을 아이들과도 자연스럽게 나누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 삶이 안겨주는 기쁨을 아이와 어른으로 조각내고 싶진 않았다. 그게 집 밖에서는 또 어디가 될 수 있었을까, 당시 내게는 그저 자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로, 숲으로, 산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다.

 

 

경주로 이사 오고 난 뒤, 주말이면 나는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산을 찾기 시작했다. 육아의 힘든 여정을 산에서라도 해답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덩치 큰 구름도 멈추게 만드는 남산 자락이 멋들어지게 길게 펼쳐져 있었다. 저 초록 덩어리 속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찾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특별한 장비 하나 없이 그저 들어가기만 하면 뭐든 될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이름 모를 사람들의 발걸음이 쌓인 정겨운 흙길에 드디어 우리는 발을 댔다. 나이 많은 거대한 소나무 뿌리가 꼭 껴안고 있는 작은 바위들은 아이들 발에 딱 맞는 계단이 되어 주었다. 다양한 나무들이 굽어보는 가운데 우리는 분명 환대 받고 있었다.

 

놀기 위해 태어난 아이들은 숲속에서 자신의 세상을 되찾은 것 마냥 생기가 넘쳤다. 그저 산속에 놓여 있음에 벌써 내 마음은 편안해졌다. 산은 참 이상하다. 동물적인 감각이 되살아나는 걸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숲을 사랑하게 된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외부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우리 또한 자연의 질서에 스며들었다. 더 이상 아이들과 타인을 향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조심스러움을 넘어선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들은 마음껏 자신을 펼쳐내며 달렸다. 그러다 나무 요술봉을 찾아내 여기저기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솔방울, 나뭇가지, 돌, 잎사귀들은 자연이 주는 자상한 놀잇감이다. 쓰러진 나무도 기꺼이 몸 놀이를 허락해 준다.

 

 

 

자연이 놀이터라는 말을 실감한다. 나들이용 작은 버섯 도감이나 풀 도감을 가지고 오르면 산행이 더 풍성해진다. 오르기 힘든 구간이 생기면 잠시 멈춰서 신기하게 생긴 버섯과 식물의 이름을 찾아보기 좋았다. 아이들은 이내 놀이를 바꾸어 맛있는 열매 밥을 지어왔다. 이끼 카펫이 깔린 바위에 걸 터 앉아 진짜 새참도 나누었다. 조금 흘려도 괜찮았다, 개미들이 찾아오길 기다리면 되었다. 가던 길에 계곡을 만나게 되면 옷을 적실 수밖에 없지만 그것도 좋았다. 나무숲에서 신난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 포개어지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산에 들어가면서 꼭 정상까지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늘 목표 지향적이고 경쟁 체제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자연을 정복하듯 정상에 오르는 것이 등산이라고 믿어왔던게 아닌가 싶다.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들어갔다 내려오면 되는 당연한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은 한박자 느리게 받아들였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늘 변수가 따른다. 끝까지 정상에 가고 싶다는 말이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날도 있었다. 그렇지 않은 날은 그것대로 좋았다. 포기해도 괜찮았다. 쿵쿵 뛰어도, 소리 내어 울어도 괜찮았다. 산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없이 지켜주고 있었다.

 

 

 

우연찮게 올랐던 첫 남산 불곡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198호)이 따뜻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바위 면을 90cm 깊이의 작은 굴 모양으로 파내고, 그 안에 새긴 불상이다. 남산의 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7세기 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라시대의 어느 여인의 얼굴을 모델로 한게 아닐까 하는 구절을 본 적이 있다. 넉넉한 인품이 느껴지는 감실부처님 앞에서 나는 어떤 기도를 올려야 할까 생각했다. 오늘도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가 되면 좋겠다, 누구나 품어주는 산처럼 우리 사회가 덜 각박해지면 좋겠다, 아니 나부터 이 아이들에게 좀 더 다정해지면 좋겠다, 그래 결국 나는 고작 내 마음의 평화를 빌었다. 이후 이곳은 우리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아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이 나라에서 돈이 없으면 아이를 못 키우는 두려움 가득한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 불안한 현실을 받들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어른들이다. 아이들에게는 아량과 이해와 포용을 일깨워주려고 하면서 정작 이 사회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품을 내주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산에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살리고 있다. 대 자연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를 받고 난 이후, 우리는 틈만 나면 산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흔들어댄 마법에 제대로 걸렸나 보다. 산을 오르는 일을 멈출 수 없게 된 거다. 우리는 어느새 산을 오르는 아이들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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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경

생태적인 삶과 자연농 농부로 사는 게 꿈입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며, 보다 나다운 삶을 살려고 합니다.

여덟 여자아이, 여섯 남자아이, 남편과 시골에서 살림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yoonirise

yoon.vertclair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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