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일곱,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 집안의 둘째딸로 태어난 지은이라는 사람이 적어도 7가지가넘는 ‘업(業)’이라는 것을 넘어가는 과정 속 시간, 비용 두려움이라는 존재와 싸우며 부캐(부캐릭터)를 얻어간 순간의 이야기들.
나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팬심이라는 것은 남의 이야기로만 믿으며 살아왔다.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여의도와 약 15분 남짓 떨어진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지금은 사라진 KBS 가요 톱텐, MBC 음악중심에 출근하는 가수들을 보러 갈 수 있었다.
90년대 말 2000년대 초입의 그때는 god의 노래가 전국에 퍼지는 시기였다. 방송국과 학교의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지 아침 등교를 하면 교실 곳곳에 하늘색 우비를 입고 앉아있는 친구들을 볼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하늘색 풍선을 든 소녀들이 귀가 따가울 듯한 데시벨로 꺅꺅 소리를 지르며 교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방송국 앞에서 잠깐 스쳐간 가수 오빠들의 무용담을 털어 놓았다. 가끔은 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고 "어제 계상 오빠와 스친 신성한 손이야, 만지지마!"를 외치며 교실로 들어오는 친구도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팬심까지 콜라보가 된 교실에서는 다양한 덕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그때의 나도 이어폰을 꽂고 god 노래를 듣던 조용한 팬이었지만, 친구들이 함께 방송에 가자는 이야기에 선뜻 답해본 적은 없었다. 15분 거리였는데도 말이다.
이런 나의 모습은 대학생, 직장인이 되어서도 매한가지였다.
좋아하던 가수는 바뀌어 갔지만 누군가를 깊게 좋아하는 소위 ‘덕후’라는 것은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하며 살았다. 싸이월드 배경음악을 바꾸려 도토리를 충전하거나, 굉장히 유명한 가수의 콘서트 티켓이 우연히 생기면 즐기다 오는 수준 정도였다. '아마 나는 누군가를 따라다니거나 티켓팅을 위해 광클릭을 하는 일은 없겠지?' 앞으로도 영영 그렇게 살아갈 줄로만 믿었다. 하지만 SNS가 생기고 몇 년이 지난 후, 이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빠져 버린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페이스북에서 만난 ‘글’이었다.
피드에서는 친구들이 ‘좋아요’를 누른 글을 가끔 볼 수 있었고, 어느 새부터 몇 명의 ‘작가’라 불리우는 사람들의 글에 좋아요와 팔로워 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작가들의 글이 피드에 점차 채워지고, 나는 매일 누군가 적어 올리는 글을 읽기 위해 페이스북에 들락날락 하게 되었다. 몇 년이 흐르자 좋아하는 작가들이 참여한 ‘글 구독 서비스’에 돈을 내고 가입도 하고, 책과 관련된 굿즈도 가끔 사는 나를 발견했다.
때는 코로나에 걸리면 큰일 날 것 같던 2020년이었다. 당시 나는 혹시라도 감염이 될까 매일 도시락을 들고 출퇴근을 하던 직장인이었다. 사람이 많은 모임이나 약속은 일정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어느 날, 좋아하는 작가들을 한번에 종합선물세트로 만날 수 있는 북토크 공고를 보게 되었다.
코로나가 조금 무섭지만, 한번 가 볼까?
‘북토크’라는 단어가 눈앞에 스쳐 지나간 이후, 밀집 금지, 걸리면 큰일난다 등 모든 두려움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꼭 가야 한다는 마음만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때였나 보다. 하늘색 우비를 입고 학교를 소리치며 다니던 학창시절 친구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신청 사이트를 열었다 닫았다를 하던 나는 어느새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몰래 글을 읽고 좋아요만 누르던 나는,어느 새 북토크 행사날 맨 앞자리에 앉아 버린 덕후가 되어 있었다.
글을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자 언젠가부터 ‘나도 글을 잘 써보고 싶다’라는 마음의 공간이 동시에 커져 갔다. 하지만 ‘글’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너무나도 먼 거리에 살고 있는 대상이었다. 하얀 바탕에 까만 활자를 채우는 것은 선뜻 하기 어려운, 무언가 큰일날 것만 같은 두려운 일이었다. 대학교 때 레포트 한장을 쓰기도 버겁던 나에게 ‘작가’라는 두 글자는 저 멀리 훨훨 날아가 버린 풍선과 같은 단어였다. 그렇게 작가라는 단어는 막연한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품고 살아갔다.
한겨울, 어느 주말이었다.
글 팬이 되어버린 나는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페이스북을 내리다 갑자기 한 문장 앞에서 멈춰서 버렸다. 똑같은 글씨로 쓰인 문장이었는데 다섯배쯤 크게 보인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글쓰기 모임원 모집
좋아하는 작가가 올린 5분도 지나지 않은 따끈한 모집 공고였다. 약 10분이 지나지 않은 시간이 흐르자, 어디서부터 용기가 샘솟았는지 몰라도 나는 어느 새 지원서 작성을 마무리하고 제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 작가는 팬덤이 두터워 설마 뽑히겠어’라는 생각이 사라지기도 전 나는 온라인 글쓰기 수업에 참석하고 있었다.
글쓰기 선생님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을 동시에 작가로 만들어 내는 신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수강생들의 패턴처럼 강의가 끝나고 나면 다시는 수업 내용을 들여다보지 않는 학생이 나올 까봐, 수시로 ‘글을 써 내는’ 복습 모임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작년에는 글을 배운 이들이 함께 책을 집필하는 프로젝트까지 만들어 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 새 책 쓰기 프로젝트 팀원이 되어 있었다.
읽기 덕후였던 나는 어느 새 수많은 형광 하이라이트와 빨간 체크 향연인 ‘퇴고'와 '교정'이 라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하얀 종이 앞에서 무엇을 써 낼까 두려워한 사람이 어느 새 이름 세 글자가 들어간 책 한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성공한 덕후가 되었다.
책 한권이 나오기 까지 수많은 퇴고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막연히 좋아만 하던 것을 실제로 해 보는 과정이 퇴고와 비슷할까,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성공한 덕후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물론 아직도 글을 써내려는 순간 빈 종이 앞에서 막막할 때가 있긴 할 때도 있다. 휘리릭 짧은 시간 동안 눈에 확 띄는 문장을 써내려 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계속 읽고 계속 조금씩 써 가는 것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혼자서만 해도 되지만 다른 이들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 일이라면 숨지 말고 조금씩 나와서 해 보는 것 어떨까. 아주 작은 시간들이 조금씩 쌓이면 상상해 보지도 못한 순간들이 어느 새 당신의 눈앞에 다가와 있을 것이다.
* 지은이
서른 일곱의 호기심쟁이 입니다. ‘직업(業)’을 넘어가는 과정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존재와 싸운 기억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은 ‘스타트업 코파운더(co-founder), 상담심리사, 학생’을 병행하며, 순간의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서 '부캐의 발견'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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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페페
호기심을 북돋아주는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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