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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공간_공간 인문학 산책_김근영

에드워드 호퍼전을 보다

2023.08.04 | 조회 1.9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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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강원도의 국도를 달릴 때였다. 폐허가 된 커다란 건축물을 두번 만났다. 지나가며 한눈에 봐도 시간이 멈춰 버린 곳이었다. 아무도 출입하지 않고 문이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떨어져 나갔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텅 비어있는 공간이었다. 인공의 건축물이 멈추면, 아이러니하게도 주변의 식물들은 계속 자라나 그곳을 뒤덮는다. 생명이 자라고 있는데도 죽은 장면처럼 보이는 것도 또 다른 아이러니다.

옆에 있는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멈춰버렸을까?”, “저 건물은 무슨 용도였을까?”, ”관광지 근처에 있는 걸로 보아 유스호스텔 같은 거였을까?”

질문을 하고 있지만, 사실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상상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내는 추임새 같은 것일뿐. 그러면서, 상상 속에서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산정호수의 유스호스텔, 경주의 유스호스텔. 중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에서 묵었던 숙소들이다. 영화나 드라마의 시대물에서 봤던 장면과 나의 기억이 섞이며 이미지화하는 것이었을까. 까마득하기도 하고, 며칠 전의 일 같기도 했다.

 

과거의 흔적이 남은 도시의 폐허 /사진 출처  Pixabay
과거의 흔적이 남은 도시의 폐허 /사진 출처  Pixabay

 

지금과 같은 형태의 근대 도시가 탄생한 것도 벌써 100년이 훨씬 더 지났다. 지난 20세기 초 전세계적으로 식민지배, 전쟁 등을 겪으면서 도시는 부침을 거듭했다. 한국은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는데, 그로부터도 50년 넘게 지나온 것이다. 그 사이 우리 인류의 삶도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공간은 언제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담아 저 나름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번 지어진 건물, 부대시설 등은 바뀌는 삶을 따라 그때그때 없애고(허물고) 다시 만들기(짓기) 어렵다. 그래서도 안 되고. 때문에 세월의 변화에 따라 생명력을 잃고 폐허가 되는 공간이 생겨나게 된다. 변화가 빠르면 빠를수록 도시의 폐허는 늘어난다. 그래서일까. 폐허에는 시간의 변화가 애잔하게 새겨져 있다.

 


에드워드 호퍼 그가 도시의 화가인 이유

 

지난 7, 비가 보슬거리며 내리던 날, 도시를 그린 화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그림들을 만나고 왔다. 전시가 열리는 서울시립미술관은 정동길의 끝에 자리하고 있는데, 언뜻 호퍼의 그림 속 풍경을 닮은 곳이기도 했다. 마침 비가 내려 채도가 낮은 그의 색감이 캔버스 바깥까지 이어진 듯했다.

호퍼의 그림은 여러 책들의 표지 삽화로 쓰였고, 어느 대기업 온라인 몰의 광고에 패러디되어 우리에게 익숙하다. 뿐만 아니라 히치콕부터 시작, 당대의 영화들도 그의 그림을 영화의 장면으로 만들곤 한다. ‘도시의 고독을 그린 유명한 화가로만 알고 있을 때는 솔직히 전시를 볼 생각까지는 안 들었다. 하지만 100여 년 전에 그린 그의 그림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눈을 만족시켜 주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의 전시를 본 후, 나는 어쩔 도리없이 그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도시를 그린 화가인 그와 도시라는 공간이 참으로 묘하게 한 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는 시간의 흔적이 유난히 잘 드러나는 공간이다. 새롭게 탄생했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아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운명을 지닌 공간인 것이다. 순수한 자연 공간이 스스로의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자연은 순환하는 시간에 따라 그 자신도 함께 순환한다. 낮과 밤, 계절의 변화를 따라 변한다. 당연한 일이다. 살아 숨 쉬는 생명들로 이루어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나무 같은 생명체들은 생을 마감하기도 하는데,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 끝이 도시 공간과는 다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공간 속 건축물들은 어쩔 수없이 시간이 지나면 낡고, 새로운 기술의 출현으로 인해 불편해지고, 그래서 철거되어 사라지거나 버려져 폐허를 만든다. 호퍼의 그림에서는 도시에서의 시간의 흐름이 직감적으로 느껴지는데, 그로 인해 묘하게 도시인의 감성을 건드리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이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와도 꽤 연관이 있다.

에드워드 호퍼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 하의 도시가 탄생하는 시기였던 1887년 미국 뉴욕 주의 나이액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마침 그가 태어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뉴욕으로 이주해 오면서 하루가 다르게 대도시로 급성장하던 시기였다. 그는 굉장히 내향적인 사람이었는데, 여행을 아주 좋아했다. 평생 뉴욕에서 살았지만, 20대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30대에는 뉴잉글랜드에서 수차례 체류하며 그림을 그렸다. 나중에는 아예 뉴잉글랜드 케이프코드의 트루로라는 작은 마을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매해 여름과 초가을에 그곳에 머물며 작업을 했다고 한다. 풍경화가였던 그에게 장소의 변화는 당연히 매우 중요한 의미였고, 그의 그림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 그림들

 

에드워드 호퍼 <오전 7시> 1948 /그림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에드워드 호퍼 <오전 7시> 1948 /그림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호퍼의 <오전 7>라는 작품이다. 그려진 때는 1948년 그의 나이 50세 정도였지만, 그림은 그보다 15년도 더 이전에 있었던 장소를 담고 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곳은 뉴욕의 나이액이라는 지역의 주류 밀매 업소였다. 호퍼가 이 그림을 그린 때는 이미 금주령이 해지된 지 1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과거의 장소를 소환해서 그린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던 곳은 그림 속 장소가 아닌 새로운 곳 뉴잉글랜드의 케이프코드 지역, 트루로라는 마을에 있는 스튜디오였다.

오래 전, 자신이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을 그렸던 그는 이렇게 과거에 살았거나 여행했던 장소들을 기억 속에 저장하고 있다가, 시간이 지난 후 회상하며 그리곤 했다. 요즘처럼 사진을 찍어놓고 그와 똑같이 그린 것도 아니고, 그림 속에서 배경과 건물을 생략하거나 조합하면서 그렸다. 그는 다양한 시공간을 넘나들어 존재하며, 실재와 상상을 동시에 하나의 그림에 담은 화가였다. 내가 호퍼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정중동(靜中動), 고요하지만 분명 팽팽하게 긴장하게 하는 역동감은 그의 그림이 단지 눈앞에 있는 정경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공존 : 꿈과 현실, 어린 시절과 현재, 상상과 실재

 

그런 시공간의 뒤섞임을 통한 심리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그림이 있다. 1949년에 그린 <계단>이다.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뉴욕 나이액의 집 안 계단에서 아래쪽 현관을 내려다 본 시선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실제로 그 집에서 현관을 나가면 길 건너편에 허드슨 강이 흐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림 속에서는 문을 열면 숲이 펼쳐진다. 그것도 굉장히 깊고 어두운 숲이다. 이 그림 역시 이미 떠나온 지 35년이 넘은 시점에 과거의 공간을 회상하며 그려졌다.

에드워드 호퍼 <계단> 1949 /그림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에드워드 호퍼 <계단> 1949 /그림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그림 앞에 서서 가만히 들여다본다. 오래지 않아 나는 그곳 계단 위에 서 있다. 이렇게 계단이 있는 싱글하우스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나를 그곳에 두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어린 시절 읽었던 소설 속 장면 같기도 하고, 언젠가 여행지에서 묵었던 숙소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그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문밖의 숲을 보고 있다. 어느새 그곳을 향해 발을 내딛어 계단을 하나씩 내려오는 나.

시간은 다시 더더 과거로 간다. 친구들과 숨바꼭질할 때 자주 숨었던 이불장 속 어둠 같기도 하고, 엄마를 기다리던 저녁 어스름 같기도 하다. 혹시 나의 의식이 허락하는 기억보다 더 오래 전, 누워만 있던 아가일 적의 느낌일수도, 엄마의 자궁 속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저 깊고 푸른 숲은 나를 어린 시절로 혹은 꿈속으로 데려가 줄 것만 같다.

그곳은 한편, 어른인 내가 늘 동경하는 자연 깊숙한 곳 같기도 하다. 빌딩 숲 근처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나는 어느새 여행중독자가 되었다. 나의 마음이 이제 여유를 거의 잃어간다 싶을 때면 어디라도 잠시 다녀온다. 유명한 여행지가 아니어도 좋고, 좋은 숙소가 아니어도 된다. 그렇게 다녀오면 또 그런대로 도시인으로 산다. 그 여행을 원하는 마음이 저기 바깥의 깊은 숲에 가서 닿는다. 이 계단을 내려가서 문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바로 그 여행의 숨을 쉬게 될 것 같아서, 이 그림 앞에서 꼼짝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상상 속에서지만 이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내려가 문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이곳이 바로 나의 집이기 때문이다. 저 어두컴컴한 미지의 숲을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 외면해버리지 않는 이유이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이 공간이 있기에, 저기 앞도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들어갈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정착지가 있는 이가 여행자가 될 수 있듯이 말이다.

 


도시인의 삶

 

그의 그림 속 집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인 것도 같다. 호퍼가 치밀하게 계산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그림은 도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우리 현대인의 마음을 흔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도시도 계속될 것이고. 인류가 더 이상 이 지구상에 살 수 없는 날이 오면 그때 함께 소멸되겠지만 말이다. 도시는 자연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각박함과 허무한 채워짐을 주곤 하지만, 우리가 이 도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도시가 남기는 폐허와 흔적들이 우리에게 고통만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과거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든, 낡은 것이 주는 푸근한 위안이 되었든, 우리는 그 흔적들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도시를 사랑하지만 도시의 문제를 절감하고 탐구했던 도시인,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게서 힌트를 얻어 보면, 그런 폐허의 흔적을 지나치지 않고 가까이에서 응시하는 것으로서 이 도시의 새 역사를 써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길에 만나는 폐허를 지금의 삶과 겹쳐 보기도 하면서. 

그리하여 도시가 우리에게 주는 괴로움이 분명하면서도 또한 그 편리함, 생동감, 새로움이 주는 짜릿함을 한쪽 손에 잡고, 언제든 짙고 푸른 숲으로 들어가 볼 마음의 준비를 다른 한 손에 해두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도시인인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도시의 삶을 그런대로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순환적인 리듬이 아닐까 싶다.

 


글쓴이 김근영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30대와 40대 초 타국과 타지역에서 거주하며,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가족의 주부로 살았습니다. 다시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온 지금, 다양한 공간을 넘어 다니며 의문을 품었던 것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글을 씁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사람들, 장소들과 친밀한 경험을 나눕니다.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그 소중한 경험들과 그로부터 배운 삶의 가치들을 글로 쓰고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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