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TMI를 좋아합니다_어느 심리학자의 고백_이지안

2024.10.07 | 조회 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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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D는 교회 친구이자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다. 아이가 D의 반에 배정되었을 때, 선배 학부모는 “DTMI(Too much information, 세부 내용을 지나치게 많이 말하는 사람). 말 걸 때 조심해야 해라고 주의를 주었다. 이곳 학교는 학부모와 선생님이 학교에서 마주치면 격의 없이 대화하는 편인데, D에게 말을 걸면 한참 대화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잔뜩 인상을 구겨 쓴 D와 마주쳤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어?" D는 한숨을 푹 쉬더니 수업 시간에 촬영한 영상을 학교 시스템에 업로드해야 했는데 오류가 생겼고, 그사이 아이들은 소란스러워졌고, 결국 수업시간이 끝나버렸다는 이야기를 또박또박 자세히 했다.

며칠후 교회에서 다른 친구 M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D가 다가왔다. 그녀는 내게 뭔가를 말하려다가 M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 또다시 수업시간 영상 업로드 에피소드를 원인부터 결과까지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다. D가 말하려던 것은 그래서 업로드 방식을 바꾸었다는 결론이었다. 그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M을 위해 그 많은 이야기를 다시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D의 수다가 길어지는 경우는 보통 타인이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할 때, 자기 감정을 분명히 표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임 날짜를 바꿔야 할 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할 때, 제안을 거절해야 할 때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었다. 예상치 않은 일로 계획을 바꾸게 되어 얼마나 미안한지, 부탁을 들어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인사를 잊지 않았다.  

나는 이런 말하는 수고를 해내는 사람들이 부럽고 심지어 존경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워낙 어떤 내용이든 요약해서 전달하고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려는 버릇이 있어서일 것이다. 상대가 그만큼 듣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말을 아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대강 말하고 넘기기도 한다.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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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상담이론을 배우다 보면 일관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의사소통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호하게 나눈 대화는 오해를 낳기 마련이고,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 된다. 특히 갈등이 생겼을 때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전달해야 갈등이 줄고 부부관계에 대한 만족도가 올라간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처음에는 문화적인 배경이 달라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우리가 배운 부부상담 이론은 서구 사회에서 탄생했다. 보다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소통하는 것을 선호하는 서구문화의 특성이 반영된 것일 거라고 반쯤은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제로 어떤 사회에서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 맥락에 근거해 소통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대체로 대화의 맥락과 청자와 화자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권 문화에서는 에둘러 말하거나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 우리에게도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 ‘찐친’이라 생각하고, ‘이심전심’, ‘척하면 척’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있다. 오히려 자세히 풀어 말하는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말이 많다’고 핀잔하기도 한다. 비교적 사회 위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상사나 선배, 부모나 시어른에게는 버릇없거나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인상을 줄 위험도 있다.

나만 해도 마음을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를 덧붙이고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전달하는데 서툴렀다. 서툰 일을 잘하려면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하는데, 그것에도 게을렀다. 하지만 관계에서 오해가 생겨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그 공백때문이었다. 결혼생활까지 가지 않아도 친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이해하겠지하고 대강 한 두 문장으로 이야기한 것이 나중에 내가 전혀 의도한 바와 다르게 전달된 것을 알고 화들짝 놀라곤 했다.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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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말 사이 표현되지 않은 공백을 부정적인 해석으로 채워 넣곤 한다.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단서에 보다 쉽게 주의를 기울이는 부정적 편향(negativity bias)'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가 "오늘 입은 옷 독특하네"라고 말했을 때, ‘옷이 개성 있고 예쁘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옷이 무난하지 않고 이상하다는 건가?’라고 의심하게 된다. 상사가 상황적인 어려움이 컸다는 의미로 “이번 프로젝트는 힘들긴 했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을 때, ‘내가 실력이 모자라서 힘들었다는 건가’라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함께 주말을 보내기로 해놓고 몸이 힘들어서 다음에 만나면 좋겠어라고 말한다면 친구는 우리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가, 원래 만나기 싫었던 건가와 같은 괜한 상상을 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회사일이 많아 전날 밤늦게까지 마무리 짓느라 피곤했고, 그 때문에 지쳐서 만나도 제대로 이야기 나누기 어려울 것 같다고 상황을 전한다면, 불필요한 오해로 감정이 상할 일도, 관계에 서운함이 쌓일 여지도 줄어들 것이다.

조금 더 수고를 들여 내 의도나 감정까지 덧붙인다면, 상대가 부정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더욱 줄여줄 수 있다. “나 요즘 너무 바빠”라고 말을 끝내기보다 “요즘 바빠서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라고 말을 한 저의를 확실히 알릴 수 있고, “나도 모르겠어” 보다 “나도 모르겠어. 답을 주지 못해서 아쉽다”라고 마음까지 전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노력이 드는 일이지만, 상대에게 상대가 불필요하게 번민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친절한 행동이기도 하다.

게다가 TMI식 화법은 자기에 대해서 더 많이 드러내게 되어 관계의 질과 깊이가 좋아지는 효과마저 있다. 관계에서 자신의 감정, 생각, 경험을 타인에게 공유하는 것을 ‘자기개방’이라고 하는데, 연구자들은 자기개방을 많이 할수록 상대는 친밀감과 호감이 높아지며 관계 만족감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줄 때 상대는 편안하고 가깝게 느끼며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 또한 상대를 안심시켜 주는 행위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그런 수고가 필요할 것이다. 더 많은 맥락과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어 우리의 상상이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기 쉽기 때문이다. 가끔은 자칫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서 TMI가 되기로 자처할 때, 내가 마음을 바꾼 사유, 청을 하는 이유에 내 감정과 상황을 한두 마디 더 붙일 때, 상대의 마음에 그만큼의 평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김숙현 외. (2001). 한국인과 문화간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북스. 

존 티어니, 로이 F. 바우마이스터. (2002). 부정성 편향. 정태연, 신기원 역. 에코리브르. 

Collins, N. L., & Miller, L. C. (1994). Self-disclosure and liking: a meta-analytic review. Psychological bulletin, 116(3), 457–475. 


 

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성격 좋다는 말에 가려진 것들>을 출간하였고,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하였습니다.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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