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봄과 응답에 대하여 <러브레터>_연애하는 영화_홍수정 영화평론가

영화 <러브레터>(1999)에 관한, 약간은 새로운 이야기

2023.02.24 | 조회 1.08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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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 글을 시작하기 전, 지난달 28일 구독자분들의 메일로 <색,계>에 관한 글이 잘못 전송된 일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코너는 오늘부터 시작되니까, 이번 글부터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어느덧 봄이 성큼 눈앞에 다가왔지만, 겨울의 자취는 발끝에 남아있다. 이 계절이 우리를 완전히 떠나기 전에 겨울 영화 한 편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에 남겨두고 싶다. <러브레터>(1999)가 그 주인공이다.

요즘은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 1999년에는 무수한 사람이 허공에다 아련한 표정으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기도 했다. 그만큼 센세이셔널한 작품이었다. 영화는 줄거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하얀 설원의 풍경으로, 때로는 잔잔한 음악으로, 또는 코끝을 얼리는 차가운 감각으로 남는 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줬다. <러브레터>는 특유의 여린 감성으로 남은 작품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영화의 내용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을까?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던 어떤 여자가 추억을 정리하고, 또 다른 여자는 첫사랑의 기억을 되살리는 내용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러브레터>를 다시 돌려본 최근, 나는 이 영화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 아래부터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남자친구 '이츠키'를 떠나보낸 지 3년이 되는 해.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죽은 이츠키의 고등학교 앨범에서 그의 옛날 주소를 찾아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는 엉뚱한 이에게 도착한다. 이츠키와 동명이인이었던 여자 이츠키(나카야마 미호)에게로. 이름이 같아서 히로코가 착각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두 여자는 편지를 주고받고, 히로코는 남자친구의 학창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과거 회상 장면들이 나오며 우리가 기억하는 무수한 명장면들이 등장한다. 

개강 첫날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를 보고 부끄러워하는 소년과 소녀. 커튼 뒤에서 책을 읽는 소년 이츠키. 늦은 밤 자전거 주차장에서 나누는 대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녀의 머리 위로 종이봉투를 씌우며 장난을 치는 소년. 그리고 여자 이츠키는 과거를 회상하며 미처 알지 못했던 첫사랑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주요한 서사다. 하지만 내게 좀더 인상적인 것은 '아키바(토요카와 에츠키)'의 이야기다. 그는 남자 이츠키보다 먼저 히로코를 만났고, 먼저 좋아했다. 그리고 이츠키가 죽은 뒤에도 히로코의 방황을 함께 하며 곁을 지킨다. 결국 아키바의 도움으로 히로코는 죽은 남자친구를 서서히 떠나보낸다.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재밌는 것은 그런 아키바를 남몰래 좋아하는 여자도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히로코에게 "당신 때문에 내가 아키바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등장으로 짝사랑의 고리는 무한히 확장된다. 여자 이츠키를 바라봤던 남자 이츠키, 그런 이츠키를 여전히 바라보는 히로코, 그런 히로코를 바라보는 아키바, 그런 아키바를 바라보는 다른 여자.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바라봄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응답받지 못해도 여전히 그곳에 있는 눈길.

하지만 <러브레터>는 슬픔에 빠져서 좌절하고 마는 영화는 아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어느 소년의 마음이 첫사랑에게 무사히 도달하는 것처럼, 아키바의 마음도 마침내 히로코에게 스며든다. 오해를 덜기 위해 미리 강조하고 싶다. 나는 지금 오랜 짝사랑은 모두 결실을 얻게 된다는 낡은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차가운 겨울처럼 홀로 지속되는 마음이 있다면, 마치 겨울눈이 녹듯이 그런 마음이 상대에게 무사히 도달하는 신비로운 순간도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긴 바라봄과 짧은 응답. 쉽게 지나치고 마는 그 짧은 전환의 순간이 반짝이는지를 <러브레터>는 보여준다.

<러브레터>의 시그니처로 기억되는 히로코의 외침, '오겡끼데스까(잘 지내시나요)'는 사실은 서글픈 순간이다. 아무리 목 놓아 외쳐도 그녀는 자신의 메아리밖에 듣지 못한다. 그것을 응답이라 생각하고 위안을 얻었던 추운 시절을 그녀는 겪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는 마침내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되돌려 받는 것은 진정한 응답이 아니라는 것을. 히로코는 지금쯤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녀가 살아있는 이들의 온기가 묻은 대답을 들으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곳에는 아마도 지금쯤 봄이 왔을 것이다.

 

 

[코너] 연애하는 영화

연애 영화를 한 편씩 꼽아 함께 들여다보며 인간의 감정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에 관한, 그보다는 마음에 관한, 사실은 당신과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공간. 

 

[필자 소개] 홍수정 영화평론가

혼자서 영화와 글을 좋아하다가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활동을 시작했어요. 잡지와 웹진에 영화, OTT, 문화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영화를 주제로 한 모임(https://netflix-salon.com/meetups/1231)도 시작했어요. 재밌게 읽어주세요 :)

브런치 블로그 -  https://brunch.co.kr/@comeand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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