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동안에 나는 점점 비통한 감격에 휩싸여 나중에는 목구멍에 경련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나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불안한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억제하며 겁먹은 듯 귀를 기울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는 타인들로부터 소외되어 홀로 지하에서 생활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타인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과잉된’ 자의식의 소유자로, 홀로 지내면서 온갖 공상을 이어나간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타인들을 항상 비난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가 지닌 너무 높은 기준, 또는 타인들과 다른 기준 때문에 마음 속으로는 타인들을 멸시하기 일쑤이며, 동시에 타인들이 자신을 멸시하고 있다고 믿기도 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마음이 병든’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그의 특성을 오로지 병적인 것만으로는 볼 수 없다. 그는 나름대로 고고한 이상을 알고 있으며, 그런 인상을 추구하기도 한다. 속물적인 삶에 편입되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하에 갇혀 사는 삶을 스스로 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타인들과 불화하는 그런 상태가 계속되다보니, 여러 면에서 마음이 취약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히스테리, 비난, 시기, 질투, 증오, 자책감, 자기혐오, 죄의식, 공격성 같은 것으로 점철되어 스스로 어찌하지도 못한 함정에 빠져 있는 것처럼 그려지는 것이다.
사실, 그의 내면은 너무 복잡하게 꼬여버린 나머지, 더 이상 다른 누군가가 들어주고 그 꼬인 실타래를 풀어주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타인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동시에 타인을 경멸하고, 타인과 잘 지내고 싶지만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며, 타인을 지배하고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그러고 난 뒤에는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더 모욕당할 만한 존재라고 믿는 비난과 수치심의 모순. 자신이 고귀한 존재는 아니지만, 자기가 고귀한 이상을 알고 있다는 딜레마. 사실 심리상담사조차 이런 것들을 다 듣고 이해하며 받아들여주고 치유해주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가 단 한 명, 리자라는 여성에게 그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심한 굴욕감과 자기혐오를 느끼지만, 그래도 어째서인지 그녀 앞에서는 그 모든 마음에 쌓인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을 도리가 없다. 리자는 그를 이해하고, 연민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고자 한다. 사랑은 예외다. 사랑은 온 세상 사람들과는 불가능한 어떤 지점을 공유하게 하고,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게 한다. 받아들여질 리 없는 마음이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사랑에 있고, 그렇기에 사랑은 때론 마음의 가장 절실한 치료제가 된다. 사랑에는 그렇게 이 세상의 법칙에 빗금을 치는 예외로서의 성격이 있다.
물론, 그는 결국 그 사랑에 뛰어들 용기를 갖지 못한다. 말하자면, 거의 사랑에 뛰어들었고, 이제 남은 발 하나만 떼면, 자신이 ‘이해받는’ 초유의 세계에 들어설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용기를 내지 못하고 물러선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적어도 그의 마음이 폭발하며 사랑에 진입해가는 그 순간에 대한 묘사 만큼은 문학사에서도 보기 드문 압권이라 말해진다. 세상 모든 것을 버렸고, 또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한 사람에게도, 사랑이 때로는 예외로서 그 가능성을 열어보이는 일이 있다는 건, 거짓 보다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달리 말해, 사랑에는 관념을 해방시키고 끌어안는 힘이 있다. 결국 사랑 앞에서 자신의 온갖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을 쏟아내고 난 다음에는, 현실로 존재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 남아 있다. 관념은 쏟아버린 물처럼 증발해 사라지고, 남는 건 눈앞의 사람과 나누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육성, 눈빛, 살갗, 포옹, 그렇게 함께 있는 생생한 현실이 육박해 들어온다. 인간이란 관념 속에서 온갖 상처에 뒤엉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관념을 털어낸 자리에서,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는 존재라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거기에는 한줌 용기만 있으면 된다. 이제 새로운 현실로, 새로운 시간을 들어서서, 자신의 삶도, 자아도 새롭게 만들어나갈 그 한 줌의 용기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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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인문학' 글쓴이 - 정지우
작가 겸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며, <청춘인문학>,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너는 나의 시절이다> 등을 썼습니다.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쓰면서 더 잘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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