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의 어릴 적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며칠 전 오랜 만에 베토벤 소나타와 쇼팽의 왈츠를 연주하다 문득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예술중학교에 보내 달라고 때를 쓰며 울어대던 13살 그녀가 떠올랐다. 연필을 쥐기 전에 피아노부터 쳤었고 엘리의 작은 손가락이 그렇게나 크고 여러가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피아노에 앉아 피아노를 쳤다. 특히나 혼자 있을 때 엘리는 피아노와 한 둘이 함께하는 시공간에 무척이나 몰입했고 마냥 행복했다. TV에서 들려와 마음을 홀렸던 음조를 연주해 본다던가, 연주에 자신있는 곡을 눈을 가리고 연주해보기도 했다. 한 단계 한단계 연주의 폭을 올리고 많은 시간 연습으로 새로운 작곡가의 연주집으로 넘어갈 때면 짜릿했다. 그녀에게 성취감이란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한 것도 피아노였다.
그러던 엘리는 어느 날 ‘연습한다고 과연 이 곡을 칠 수 있을까?’라는 좌절감과 함께 며칠 피아노를 피하기 시작했다. 바흐의 인베션 1번 (Bach Inventions No.1)이었다. 오른손의 멜로디가 그렇게나 어렵거나 빠르지 않았다. 그런데 왼손의 연주가 기존에 치던 곡들과는 완연하게 달랐다. 메인이 되는 오른 손의 연주에 보조를 맞추는 기존의 악보가 아니었다. 오른 손의 영역이었다고 생각하는 멜로디의 움직임을 왼손도 같이 걸어가듯 연주해야 했다. 익숙하지 못한 악보가 어색했는데, 악보를 읽었음에도 왼손이 따라오질 못했다. 고행이었다. 인벤션은 바흐의 대위법 연주곡 연습의 시작이었다. 대위법은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작곡 기술이고 바흐는 대위법의 대가였다. 처음 도전하는 왼손의 독립적인 연주 시도와 함께 머리속이 지끈해졌다. 손가락과 뇌는 직접 연결된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곤 했다.
한 페이지에 있던 악보 마디를 쪼개고 쪼개서 며칠 간 연습에 연습을 해야 했다. 열 두살 엘리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안될 것만 같았던 왼손이 독립적이고 도도한 음률을 연주하며 오른손의 선율과 조화를 이루어 냈다. 그리고는 이내 악보를 읽는다는 의식 없이도 연주가 가능했던 다른 곡들처럼 손가락들이 춤을 추었다. 눈물이 질끔 날 것처럼 기쁜 순간이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발휘되는 암묵기억에 따르는 영어
피아노를 치는 것은 암묵기억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즉 몸에 배어 자동으로 발휘되게 하는 기억의 요소인 것이다. 필요한 기능을 단순반복해서 몸으로 익히는 기억이 암묵 기억*(implicit memory)다. 이는 엘리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 오른 손 악보를 보고, 하단에 있는 왼손악보를 보고 오른손과 왼손을 의식하여 연주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에 연습할 때는 각각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몸에 베어 익히고 나면 악보를 읽는지도 모르게 때로는 정말 눈을 감고도 연주를 하게 된다. 이렇게 의식하지 않아도 필요에 따라 능력이 자동적으로 구현되게 하는 능력이 암묵기억이라고 한다('몰입영어' 위스덤하우스 발췌).
엘리는 영어를 공부하면서 자동 반사적으로 영어를 말하기 까지의 과정이 피아노 연주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실제적으로 비슷하다는 내용을 책에서도 읽게 되었다. 피아노 치는 것, 자전거 타는 것, 수영하는 것 모두 책을 읽고, 영상을 보며 이론을 습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어도 마찬가지이다. 직접 혀를 움직이고 소리를 내어 발화를 해야 실전에서 직접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이 읽는 것도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영어면접이나 발표와 같이 즉각적으로 대화나 답변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직접적으로 몸에 습관처럼 베이도록 직접 몸으로 해야 느는 것이다.
엘리는 종종 영어를 어떻게 해야 잘 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답은 간결했다. '잘' 하려고 하지말고 그냥 우선 하라고. '잘' 하려고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 내려고 머리속으로 생각하다가 함께 하고 싶었던 대화는 이미 끝이 나버린다. 또한 밖으로 말해보지 않으면 무엇을 틀리게 말했는지, 어떤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알길이 없기 때문이다. 말해보고 수정하고 연습하며 입술과 혀로 익히는 것이다.
통역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조용하지만 긴장이 팽팽한 통역수업 시간. 12명 정도 되는 동기들과, 사회에 나가서 나의 제자가 절대 실수로 망신당하지 않게 하리라는 의지가 가득한 교수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리에 서서 또는 강단에 서서 통역을 하는 실습을 한다. 수업 시간에도 통역은 보통 2~3초 내에 시작되어야 한다. 한글이든, 영어든 원문이 끝남과 동시에 습관적으로 통역을 하는데. 이 또한 가능해지는데에도 연습이 필요했다. 통역은 무조건 그 시간안에 시작되어야 하기에 실수를 하더라도 일단 '시작'해버리는 연습을 한다. 그럼과 동시에 ‘아차’하는 순간들이 펼쳐진다. 습관적으로 자주하는 실수의 구문을 머리로 인지함과 동시에, 아니 그보다 앞서 통역이 입으로 발화되어 버리고 마는 그런 순간들. 동시통역을 하면서 중간에 “음” 혹은 “어”라는 소리를 습관적으로 하는 동기들도 있고, 3인칭 단수 주어에 붙여야 하는 ‘s’ , ‘es’를 빼먹는 습관을 의뢰로 많이 가지고 있다. 시작하기 전에 실수하지 말아야지 분명 다짐을 하면서도 원문 내용에 집중하면 다짐은 날아가버리고 이전에 했던 실수를 반복하곤 한다. 인간의 습관의 동물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스터디 메이트와 각자가 반복적으로 하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 연습하고, 수업 시간에 한 영어 원문의 단락을 몇 개로 나누어 암기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스터디를 병행한다. 그렇게 영어와 통역을 몸에 새겨 넣듯 연습했다. 그리고 나쁜 습관이 사라진 통역을 한 날은, 역사적인 날로 서로를 축해해주는 기념비적인 날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엘리가 악보와 손가락과 씨름을 하며연습 끝에 피아노 한국을 마스터 하는 과정을 떠올리게 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힐 수 없고, 물이 코로 넘어가 당장 숨이 탁 막히며 허우적 되는 경험을 하지 않고는 수영을 배울 수 없다. 물을 몇번 먹다 무서워 중도에 수영 배우기를 포기한 엘리. 그녀는 바흐의 연주를 들으며 적어도 영어를, 통역을 연습한다고 숨이 넘어갈 것 같거나, 무척이나 신체가 고통스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글쓴이 : ‘순수국내파 통역사로 먹고살기’를 썼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로 세상과 세상, 언어와 언어사이의 소통을 도우며 살아가며, 세상과 사람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기도 소망해봅니다. 아이들과 학생들이 재미있게 영어를 익히도록 하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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