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얼굴_어느 심리학자의 고백_기린

2022.06.05 | 조회 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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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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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앉은 자리에는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푸는 내내 정수리 근처 머리카락을 한 올씩 한 올씩 만져본다. 유독 까끌까끌한 머리카락이 걸린다. 엄지와 검지로 만져볼수록 까끌한 느낌이 왠지 기분이 나쁘다. 빙빙 돌려 툭 하고 끊어냈다. 속이 시원해진다. 한 올씩 걸러낸 머리카락은 차곡차곡 쌓여 한 두 시간 만에 족히 서른 개가 넘는 머리카락이 흩어져있다.

중학교 3학년 언제부턴가 책상 앞에 앉으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부모님이 특별히 성적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았는데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늘 나를 눌렀다. 시험 기간이 아닌 때에도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책상 앞에 앉았다.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규범적인 최선이었는지, ‘네가 내 삶의 유일한 낙’이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를 더 행복하게 해드려야 한다는 최선이었는지, 좋은 성적을 받아야 내 쓸모가 입증되는 것 같아 매달렸던 최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최선 때문에 그 시절 나는 매 순간 빠듯했고, 또 조바심이 났다.

집중이 안 되면 안 되는대로 답답하고 또 집중이 되어도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카락을 만져볼 때, 그리고 뽑는 순간에는 그 ‘최선’을 향한 긴장감이 살짝 가벼워졌던 것 같기도 하다. 의식하든 아니든 머리카락 뽑기는 습관처럼 계속 됐고, 특히 친구의 말에 무안했다거나 선생님에게 혼났거나 하는 속상한 일이 있었던 날, 안방에서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더 크게 들리던 날은 손이 더 바삐 움직였다. 

 


 

‘발모광(trichotillomania)’이라는 진단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발모광은 머리카락과 같은 모발을 반복적으로 뽑아서 결국 모발이 확연히 줄거나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생기는 심리장애이다. 멈추려는 시도를 해보지만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는 점이 중요한 진단 기준이다. 그 시절 나의 행동은 진단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머리카락을 뽑기 전에 긴장감이 높아지다가 뽑고 난 후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심리적 기제는 비슷했다.

이 버릇은 대학생이 되어 좀 잦아들다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막막한 대학원 이후 진로에 대한 고민, 빡빡한 실습과 과제, 여러 아르바이트가 겹치며 시간은 더 촘촘해졌고, 마음이 편치 않은 날이 더 많아졌다. 이 즈음부터는 한숨을 쉬는 습관마저 생겼다.

발모광은 '강박 관련 장애'라는 큰 범주에 속한다. 강박 장애는 어떤 ‘불안’ 때문에 행동을 멈추지 못하는 질환이다. 대학원 재학 시절, 미래에 대한 불안이 기본값으로 깔린 마당에 일상에서 툭툭 튀어 오르는 사건 사고가 내 마음을 긁어댔다. 그런 날은 애꿎은 머리가 더 빠지는 날이었다. 저녁에 세수를 하고 있으면 그 날 했던 바보 같은 실수, 어리숙한 행동 같은 것들이 후드득 생각나면서 더욱 세차게 얼굴에 물을 끼얹어야 했던 날들이었다.

 

심리학, 특히 임상 심리학을 배운다는 것은 타인의 증상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배우는 과정에서 내가 먼저 도움을 받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즈음 ‘수용전념치료(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라는 최신 상담 이론이 한국에 소개되고 있었다. 수용전념치료의 출발점은 내 마음에 찾아 온 감정과 생각을 손님처럼 맞이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거다. 머리를 뽑지 않으려 하거나 불안해지지 않으려 애쓰다 보면 오히려 마음이 그 강박에 더 붙들리게 된다. 그저 불안이라는 무색무취의 감정을 판단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라고 하고 있었다. 이거구나, 싶었다.

머리카락에 손이 갈 때, 한숨이나 헛기침이 나오려 할 때, 잠시 일시정지 모드를 하고 지금 내 마음을 읽어보려 했다. 나는 또 어떤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싶은 걸까. 어떤 날은 어머니와의 통화가 화근이었다. 멀리 있어 잊고 지내다 불현듯, 여전히 고생스러운 삶을 사는 것 같은 어머니의 무게가 실감이 나는 날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 위에 돕지 못한다는 죄책감까지 포개어졌다. 그 이면에는 어머니가 행복했으면 하는, 그리고 어머니의 행복에 기여하고프다는 내 욕구가 벼랑 끝에서 아우성대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마음을 살피는 경지까지는 가게 되는 일은 자주 일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스트레스 상태구나, 하고 그저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머리카락을 뽑았다고 ‘또 머리에 손을 댔네', '이 정도 스트레스도 감당 못하나'는 자책으로 이어지는 것은 최소한 막을 수 있었다.

 


 

강박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늘 만나게 된다. 교실 앞에 설 때마다 눈을 깜박이던 선생님, 고민에 빠질 때는 어김없이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던 친구, 이야기하는 중간 중간 발작적인 헛기침을 하던 후배. 불안은 이렇듯 여러 얼굴을 하고 우리 주변에 있다. 말하는 사이사이 의미 없는 소리를 내뱉거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거나 코를 실룩거린다던지 하는 행동들 모두 나름 불안과 긴장감을 다스리기 위해 찾은 자구책이다.

일상생활을 해내기 힘들 정도로 강박적인 행동이 심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사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그 증상들과 함께 살아갈 만하고, 또 그래서 그렇게 살아간다. 나 또한 더 이상 머리카락을 뽑지 않지만, 여전히 긴장하거나 스트레스가 많은 날은 머리에 손이 간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캄캄한 밤 산타클로스처럼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 맨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화들짝 놀라 문을 열면 그는 보따리를 풀어 보인다. 묵직한 돌덩이를 하나하나 우리 집에 던져놓으면,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울고 싶어진다. 그제서야 좀 자세히 보라고 채근한다. 가만, 돌덩이가 아니라 희미한 빛을 내는 ‘기억의 구슬’이다. 강박적인 행동으로 빠지는 그 순간, 보따리장수는 ‘옜다, 네 마음이 여기 있었다’고, ‘이건 네가 좀 봐주고 알아줘야 한다’고 말을 건넨다. 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나라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 매달 5일 '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 글쓴이_기린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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