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대신 헌신하기_사랑의인문학_정지우

2022.08.01 | 조회 2.05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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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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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목적의 차이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열쇠다. (...)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새로움만 추구하는 사람은 삶의 모든 것이 재미있거나, 반대로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기분을 사랑한다."(피트 데이비스, <전념> 중)

우리는 매일같이 새로운 것들이 주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거의 매일 새로운 드라마나 영화가 쏟아지며, 새로운 샐럽들이 등장하며, 새로운 상품이나 콘텐츠에 대한 뉴스가 범람한다. 그래서 당장 한달 전에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매일 너무 많은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다 보니, 나 자신이 무엇을 꾸준히 좋아해왔고, 무엇에 꾸준히 관심가져온 사람인지조차 알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장소는 매번 새로운 핫플레이스를 찾아가기 바쁘고, 나만의 동네에서 오랫동안 관계를 맺는 가게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유튜브 채널도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고, 인플루언서나 샐럽도 매번 탄생하다 보니 과거처럼 한 인물이나 콘텐츠와 '오랜' 관계를 맺는 일도 드물어졌다. 팬덤은 마치 열대 지방의 유동하는 스콜처럼 이 채널 저 채널, 이 샐럽 저 샐럽을 옮겨 다닌다.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뜬다는 것'은 곧 '저물 것'이라는 뜻이다.

관계 또한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금방금방 달라지는 홍수 속에 있다. 최근 들어 사람들은 잦아진 퇴사, 손쉬운 인간관계 손절, 금방 SNS나 앱, 인터넷 카페를 통해 새로 사람을 만날 수 있은 모임 같은 것들에 익숙해졌다. 연인 관계도 100일이 넘으면 오래 되었다고 느끼며 기념일 파티를 한다.

피트 데이비스는 이런 시대를 가리켜 '선택지 열어두기' 시대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처럼 무수한 것들이 새롭게 쏟아지는 시대에, 어느 하나에 구태의연하게 또는 지리멸렬하게 헌신하거나 전념하기 보다는, 계속하여 선택지를 열어두며 산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 보이면 곧장 '선택지'를 갈아탈 수 있도록, 한 발을 빼놓는다. 콘텐츠, 장소, 직업, 직장, 인간관계 등 모든 것들이 그런 무한한 선택 앞에 서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당연히 사랑을 선택하기도 쉽지 않다. 사랑을 선택하더라도, 금방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마치 넷플릭스에서 영화 한편을 틀었는데,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더 재밌는 다른 영화가 있을 것 같아서 남은 1시간 30분을 견뎌내지 못하는 불안과 비슷하다. 새로운 드라마는 처음 한두편은 흥미롭지만, 금방 다른 새로운 드라마가 눈에 들어와 끝까지 정주행하기가 쉽지 않다. 사랑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기분은 즐겁다. 새로운 사람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만나는 것만으로도 도파민이 자극받는다. 만난지 얼마 안된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신선하고 싱싱하다. 그의 습관이나 취향, 얼굴의 점 하나까지도 매일 새로이 알아갈 수 있다. 마치 새로 산 휴대폰에서 추가된 새로운 기능들을 탐색할 때의 재미와 같다. 휴대폰이 집에 도착하면 언박싱할 때부터 느껴지는 설렘은 대략 휴대폰을 열어 새로운 기능들을 다 탐색하기까지의 1주일 정도면 사라진다. 사랑은 그보다는 길겠지만,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이런 시대에는 사랑도 무사하기가 쉽지 않다. 과거에는 퇴근 이후 볼 게 공중파 드라마 밖에 없었기 때문에, 공중파 채널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다. 마치 가까운 주변에서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어서, 너무 복잡한 고민 없이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지금은 오늘 저녁 선택할 수 있는 콘텐츠의 종류는 사실상 무한하다. 마찬가지로 선택할 수 있는 연인도 거의 무한하게 탐색할 수 있다. 각종 SNS, 동호회, 모임, 소개팅, 앱 등에서 말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해야할까?

피트 데이비스는 우리 시대에 사랑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전념' 즉 '헌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선택지 열어두기를 그만두고, 선택 자체에 집중하고 투신하여 헌신하는 것만이 이 시대를 건널 수 있는 최선의 삶의 태도라고 이야기한다. 무엇이든 선택하면, 그때부터는 깊이라는 걸 알게 된다. 선택지 열어두는 자유가 행복이 아니라, 선택한 하나의 깊이를 알아가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된다.

선택 이후에는 그 선택에서만 맛볼 수 있는 디테일들의 항연이 시작된다. 단 한명의 아내와 아이일지라도 그 관계 속에 매일 다채로운 경험들이 주어지고, 끊임없이 변주하는 하루하루의 디테일들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너무도 좋아하는 고전 소설을 10번 정도 읽게 되면,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뉘앙스와 주변 인물과 대사의 다양한 의미에 대해 더 풍요롭게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그쯤 이르면, 우리는 인생의 모든 순간에 그 소설을 인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관계 또한 하나에 헌신하기 시작하면, 그로부터 무한한 추억과 기억, 오늘, 내일의 깊이를 만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는 '선택지 열어두기' 시대를 역행하는 '고유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 매달 1일 '사랑의 인문학'

글쓴이 - 정지우

'청춘인문학',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너는 나의 시절이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습니다. 뉴스레터, 글쓰기 프로젝트, 각종 토크, 모임 등을 만들면서 계속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쓰며 사는 삶을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현재는 변호사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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