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제목은 어떠세요?: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편집 후기_편집자의 사생활_고우리

2022.09.06 | 조회 1.43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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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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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편집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기획을 할 때 제목을 정해놓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공부의 미래>나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가 그랬고, 나중에 제목이 바뀌긴 했지만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의 원래 제목은 <코르셋 벗기>였다. 마음에 드는 제목이 나오면 나한테는 책이 거의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책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작가가 무슨 원고를 썼는지,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고, 원고가 있으시다니 덥석 원고를 달라고 했다(아마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나도 이런 경우는 거의 처음이라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정지우 작가 글이니까.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또 하나 솔직히 말하자면 작가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사실 원고 작업은 내가 했던 가장 막막했던 작업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폴더에는 작가가 쓴 영화 감상, 서평, 칼럼, 기고문, 페이스북에 올린 엄청난 분량의 짧은 에세이 등등이 각각의 폴더별로 분류되어 있었고, 이걸 어떻게 책으로 묶나 싶었다. 원고 분량도 다르고 톤도 다르고 주제도 다르고, 하여튼 다 제각각인 원고들이었다.

분야를 정하는 것부터 기획을 시작했던 것 같다. 사회비평 에세이로 간다. 사회과학서 전통이 있는 한겨레출판에서 내기에 어울리는 장르이기도 하고, 말랑말랑 소프트한 에세이인 전작 <행복은 여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와 차별되는 에세이여야 했다. ‘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가의 정체성에 힘을 실어주고 싶기도 했다.

 

희대의 제목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희대의 제목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폴더에 담긴 원고더미에서 사회비평에 어울리지 않는 글들은 다 쳐냈다. 쳐내고 남은 글들을 다시 분류해 목차를 잡고, 각 꼭지에서 다음 꼭지로 넘어갈 때 최대한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내려고 순서를 이랬다저랬다 얼마나 많이 바꿨는지는 조판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함께한 디자이너만 안다(사랑합니다 정지현 디자이너님). 그러고 나서 밀레니얼 세대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제목을 뽑아냈다.

 

작가님, 제목은 '밀레니얼 세대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로 가려고 하는데 어떠세요?

으음, 그것도 좋은데요, 제가 페북에 올린 글 중에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가 가장 많이 좋아요를 받은 글이거든요. 이걸 제목으로 쓰는 건 어떠세요?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그건 너무 트렌디해서 유행을 타지 않을까요?

으음, 요새 책 수명이 한 3개월이면 끝나던데요 뭐. 길어야 6개월 1?

으음, 인정. 그럼 그렇게 가시죠.

 

하여 밀레니얼 세대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이 책의 부제가 되었다. 내가 그것을 제목으로 고집하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무슨 엄청난 뜻이 있었다기보다, 편집 막바지가 되니 해롱해롱 상태가 되어 뭔가를 판단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나 할까? 제목은 컨펌받았고, 제목 좋은데? 소리를 들었으니 됐다. 작가님도 좋으시다니 됐다. 그렇게 희대의 제목이 탄생했다.

이 책은 나한테 굉장히 좋은 경험이 되었다. 내가 보도자료에 쓴 대로 책이 독자들에게 읽혀졌고, 내가 의도한 대로 작가는 문화평론가로서 한동안 바빠졌으며, 책은 <분노사회>와 함께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되었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 잘 팔렸다(특히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이 매우 많이 올라온다). 나는 작가와 절친이 되지는 못했지만 작가의 다음 책을 만들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편집 후기를 출간 후 2년이 지나서 썼으니, 이 책의 편집 후기도 아마 2023년에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글쓴이 고우리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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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름모 출판사 대표. 노는 게 제일 좋은 탱자탱자 편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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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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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N

    0
    about 2 years 전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책 제목에 낚여서(?) 너무 공감되어서(?) 구입해서 본 1인 여기있습니다 ㅋㅋ 이런 뒷얘기가 있었군요.

    ㄴ 답글 (1)
  • Vietman

    0
    about 2 years 전

    발간되는 책의 수명이 3개월이나 6개월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니..... 너무 짧은 것이 슬프네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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