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 이름이 생겼다

낙엽의 비_아픔에 이름이 생겼다_허태준

2024.09.20 | 조회 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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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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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비가 온 걸까. 카페 밖으로 나서자 거리에서 젖은 냄새가 났다. 가로등에 반사되는 물자국 때문에 빛이 사방으로 튀었다. 도시가 윤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것 같았다. 드문드문 우산을 펼친 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니 방금까지 비가 온 모양이었다. 창가와 가까운 자리였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멍하니 노트북을 보고 있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글을 전혀 쓰지 못한 날에도 어김없이 그랬다. 어느새 가을이 되었나 싶더니, 금세 또 늦더위가 찾아왔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듯해 어지러웠다. 아마 비슷한 기분으로 올해를 보낼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회사를 언제 그만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작년'이라고 썼다가, 다시 '재작년'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달력을 확인해본 뒤에야 2019년 4월에 그만두었다는 걸 알았다.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 걸까. 어쩌면 우산도 쓰지 못한 채 흠뻑 젖어버린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최근에는, 그냥 잤다. 특히나 올 여름에는 잠만 잔 것 같다. 병원에서도 자고, 퇴원하고 N과 함께 살게 된 후에도 잤다. 이틀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눈을 뜨면 새벽이든 한낮이든 상관하지 않고 결핵약부터 삼켰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몸에는 좋은 일이었는지, 병원에서는 치료 결과가 좋다고 했다. 잘하면 6개월 치료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늦어도 내년이면 완치할 수 있을거라고 했다.

  잠을 자지 않을 때는 책을 읽거나 글을 썼지만, 그리 오래 붙잡고 있지는 않았다. 냉장고에 남아있는 것들로 반찬거리를 만들고, 둘이서 밥을 먹고, 다시 잠이 들려는 나를 N이 말렸다. 그러면 그가 가르쳐 준 베이스 기타를 치거나, 그가 가져다 준 만화책을 보거나, 그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함께 봤다. 좋은 이야기가 많았다.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로 화면 밖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각자의 최선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나만,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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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이 들면 온 몸이 어딘가에 맞닿아 있는 기분이 든다. 손끝이 떨리는 작은 움직임에도 무게가 느껴진다. 감각이 낯설고 불편하다. 공감의 질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들이마시는 숨도, 내쉬는 숨도, 자신이 있을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고 밀려 나간다. 둥그런 모양으로 변해, 금세 떠밀려 나간다. 나는 가라앉고 있다. 그리고 다시는 떠오르고 싶지 않다. 이대로 온몸이 퇴화해 버렸으면 좋겠다. 눈은 빛을 잃고, 다리는 걷는 법을 잊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씩 내게로 쏟아지는 생각. 차라리 잠이 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1년 반 동안, 한 번도 깨어나지 않고 긴 잠이 들었다면.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추억하지 않았다면. 텅 비어버린 페이지들만 남겨둔 채 지금에 닿았다면. 상처 받은 사람도, 원망하는 사람도 없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돌이킬 수도 없고 확인해볼 수도 없는 생각이 쏟아져 몸을 무겁게 한다.

  그럴 때면 사소한 것들을 떠올렸다. 오늘 저녁을 뭘 해 먹을까. 돼지고기 사둔 게 남아있으니 김치찌개나 할까. 아, 대파랑 두부가 없네. 사서 돌아가야 겠다. 골목에서 빠져나와 도로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 너머로 마트가 보였다. 10시가 넘어도 문이 열려 있구나. 언제 마감을 하시는 걸까. 물음표의 끝자락을 잡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람들은 모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강한 바람이 불었다. 눈을 뜨고 있기 힘들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종이나 철판, 나무나 옷가지를 스치는 소리가 한번에 몰려들더니 이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든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빗물을 머금은 은행잎이, 일렁이 듯 하늘로 퍼져, 노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로의 모든 불빛이 하나로 모여든 것만 같았다. 서로를 반사하고 그 빛깔을 투영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파란불이 되었는데도 나는 건너편으로 갈 수가 없었다. 마주 서있는 도로가 세계의 경계선처럼 느껴졌다. 왜 이런 순간이 찾아오는 걸까. 왜 나는, 아직도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저 너머로 가면 삶을 기대하게 될 것 같았다. 온기를 그리워할 것 같았다. 다시 숨을 쉬고, 반짝이는 바다를 따라, 한참을 두 발로 걷고 싶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눈부심 속에서,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걸 놓아버렸는데. 그냥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삶이 이어져도 괜찮은 걸까. 그건 잠들어 버린 시간과 무엇이 다를까. 대답을 찾지 못한 나는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하고, 도로 건너편으로 넘어가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떨어지는 낙엽의 비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픔에 이름이 생겼다'

결핵 환자로 지냈던 경험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에세이입니다. 단순한 치료 과정보다는 ‘환자’라는 정체성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자신의 아픔을 말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허태준

직업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생을 거쳐, 산업기능요원으로 지역 중소기업에서 근무했다. 당시의 경험으로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를 썼다. 회사를 그만둔 후 모든 삶은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우리 사회의 이름 없는 시절에 대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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