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말수의사

어쩌다 일하게 됐지만요_수상한 말수의사_김아람

2024.07.22 | 조회 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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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말 수의사를 원래 하고 싶었어요?"

누군가 나에게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늘 난감하다.

"아니오. 어쩌다 여기서 일하게 되었어요."

여기서 더 말하면 더 곤란한 답밖에 없는데 상대의 궁금증이 풀리지 않으니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실체를 토로한다.

"저는 졸업 직후 바로 돈을 벌어야만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동물병원 인턴 수의사 월급이 열정페이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일단 월급이 보장된 회사에 입사했어요. 거기서 말을 처음 본거나 다름없어요. 말에 대해 이전에 배운 적도 없었고요.”

답변 후 잠시 정적이 온다. 왠지 내가 무지갯빛 만화를 회색으로 만드는 것 같아서 살짝 미안하다. 원래는 말을 치료하고 싶은 강렬한 동기가 있었고, 그것을 배우기 위한 거친 역경이 있어야 했고, 현재의 반짝임을 줄줄 나열해야 하는데, 나는 다소 특이한 타이틀 때문에 생기는 관심에 비해서는, 아주 못 미더운 속 빈 강정 같기만 하다. 그래서 늘 면목이 없다.

그런 나에게, 질문자는 포기란 없다는 눈을 반짝이며 뭐라도 얻고 싶어서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그래도 여자로서 말수의사 하기 힘들지 않아요?"  

두 번째로 많이 받아본 질문이다. 힘들었던 이야기만 백만 개 하고 싶지만 체면을 좀 차린다.

“글쎄요. 힘들 때도, 아닐 때도 있어요."

몇 년 전 내 일터가 촬영 현장으로 변신한 적이 있었다. 여주인공이 무려 말 수의사라는 설정으로 드라마 촬영 의뢰가 왔었다. 꽤 놀라면서도 궁금했다. 도대체 '여자 말 수의사'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전체 인구에서 현업 수의사는 대략 15,000명 정도이다. 그중에서 말을 진료하는 수의사는 현재 100명 이하인데, 그중 여자 말수의사는 10여 명 남짓이다. 그 몇 안 되는 인원조차 말이 사는 시골이나 경마장의 제한구역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지나가며 흔히 볼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과연 PD님은 드라마에서 말 수의사를 어떤 이미지로 여기고 있을까 촬영 전 호기심이 일었다.

드라마 밤샘 촬영현장 (2014년)
드라마 밤샘 촬영현장 (2014년)

다행스럽게도 장르가 다큐가 아니고 드라마였기에 여주인공은 비주얼 적으로 엄청 멋들어지게 설정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그러니깐 세트장 안의 여자 말 수의사 주인공은, 엄청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다. 밋밋한 나의 일터는, 수많은 드라마 촬영진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 끝에 '대변신'을 했다.

가장 신나는 건 나만의 집무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멋진 책상과 형형색색의 인테리어 세트를 매주 만들고 부순다. 내 방에서 나는 사장님처럼 전화를 받는다. 거기에, 나만의 티타임 공간도 생겼다. 그곳에서 나는 언제든지 쉬고 수다를 떨면서 연애도 한다. 가장 웃긴 건, 내가 새하얀 긴 가운을 입고, 간지 나는 헌터 부츠까지 신고선 진료를 한다. 거기에 스타일리시한 블라우스까지 받쳐주니 그 화사한 미모가 더 부각된다.

사실 그 겨울, 동물병원에서의 나의 근무 복장은 똥 뭍은 안전화와, 약 뭍은 등산바지, 그리고 피 뭍은 등산 잠바였다. 촬영팀이 나에게 가끔 진료 관련 코멘트를 물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스텝 분들이 바로 코 앞에서 구경하고 있는 나를 찾지 못해 전화로 나를 찾아 헤매던 게 웃겼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그 몇 초를 찍자고 수십 명이 세트를 조립하고 분해해 가며 야밤까지 분주했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눈을 붙이며 피곤을 달래는 스텝과 함께 수차례 재촬영하는데, 오히려 주인공은 나보다 더 태연하고 능숙하게 진료 장면을 재현해 냈다. 그렇게 만든 판타지 속 말 동물병원에서는 말들이 나를 줄줄이 기다리고, 나는 모든 말을 치료하는 만능 해결사다. 그 와중에 나는 연애도 잘하고 능력도 좋은 최강 꽃미녀 능력자다. 나는 내 등산잠바를 껴입은 채로 그녀를 쳐다보며 대리만족감을 느꼈다.

입사 후 처음으로 말을 제대로 본 기억이 난다. 말은 몸이 생각보다 너무 컸고, 얼굴을 쳐다보려면 내가 올려다봐야 했다. 털은 짧고 촘촘한 진갈색인데, 윤기가 좔좔 흐르는 털 밑의 근육이 과도하게 돋보여서 그 근육에 깔릴까 봐 괜히 쫄렸다. 안전거리도 없이 내가 이렇게 서있어도 되나 일단 무섭기만 했다. 일진처럼 무시무시한 근육질 몸매와 단단한 발굽을 보면 나는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는데, 또 슬쩍 말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나를 무서워하는 듯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혹시 너도 쫄보인가 싶은 친밀감이 처음으로 들기도 했다. 그게 말과의 첫 만남, 쫄보 둘의 첫 만남이었다.

입사 후에는 나는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바로 뭔가를 해야만 했다. 말의 목에서 채혈을 해야 하는 일부터 차곡차곡 배워갔다. 배우고 익히느라 몇 달이 훅 지났다. 한 번은 말을 끌고 한 나이 많은 말관리사가 동물병원에 들어왔다. 그날은 나 밖에 없는 날이어서 내가 접수에 응대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저씨는 나를 보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수의사님 없어요?"

나는 대답했다.

"아 네, 잠시만요."

그리고선 사무실에 다시 들어가서 신발 한번 갈아 신고 온 다음 다시 나갔다.

"제가 수의산데요."

"...."

그때는 여자가 말수의사일 수 있다는 그 자체를 다들 낯설어하던 시절이었다. 아저씨는 당황했지만, 다른 수의사가 없다는 걸 알고 체념한 듯 말을 나에게 바쳤다(?). 나는 덜덜 떨리지만 멀쩡한 척하며 그간 채혈 실력을 바탕으로 목에다 주사를 했다.

그러면서 말 동네 사람들은 나에게, 나는 말에게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말과 함께 한지 20년이 다 돼 간다. 말수의사를 간절히 원한 것도 아니었고, 돈을 좇다가 들어온 게 더 정확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말이 익숙해졌고, 이제는 그 어떤 동물보다 좋아졌다. 여자로서 일하기에는 힘들지 않은가?  글쎄, 안 힘들다면 거짓말 이겠지만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힘든 것 같지는 않다.  

어쩌다 일하게 된 나는 어느덧 산의 중간턱 어딘가를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처음엔 뭐가 뭔지도 몰랐지만, 한발 한발 걸어가면서 치고 박으며 생겼던 일상 속 뜨거움을 언젠가부터는 차곡차곡 저장하고 싶었다. 지워 버리고 싶은 일도 많고, 후회 막심한 일도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나는 그걸 다 굳이 건져 올려 펼쳐 올리고 싶다. 그 어떤 모습일 지라도 떠올려 기록하고 싶은 욕구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그만큼 소중해진 일상에 대해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사실 그다지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지 않는 말 이야기를, 지금처럼 느리지만 주구장창 끈질기게 종이배로 띄우고 있다. 

어쩔 때는 글을 쓰면서도 너무 부끄러워서, 남들이 최대한 덜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을 만큼 나는 이중적이다. 그래도 용기내서 띄운 내 종이배가 당신에게 닿는다면 때로는 말 세상에 대한 호기심 충족용으로, 때로는 말 수의사의 속마음을 훔쳐보는 용도로, 편안하게 펼쳐봐 주었으면 좋겠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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